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곤 (문단 편집) == 역사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새로 징집한 병사들이 [[칼]]을 쓰는 데 능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류성룡]]이 중국에서 쓰는 '쇠 편곤(철 회편)'이 매우 좋다며 추천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일:조선의 흔한 농민.jpg]] 당시에 류성룡은 [[고양]]에 '명회(命會)'란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죽자 격분, 편곤 한 자루만 들고 일본군을 '''400명'''이나 조졌다는 예를 들었다. [[선조(조선)|선조]]도 마침 조선의 농민들은 도리깨를 자주 쓰니 이와 용법이 비슷한 편곤을 무기로 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곧바로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당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19_003|#]] [[히트 앤 런|직관적이고 단순한 움직임, 그리고 강력한 타격력은 일격을 먹이고 이탈하는 방식의 용도로 활용하기 용이]]했고 이는 편곤이 기병의 백병전 무기로 널리 쓰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수가 휘두르는 타격력에 더해 기마의 속도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위력의 공격이 가능했고, 공격이 실패하면 바로 난감해지는 보편곤과 달리 그대로 속도를 살려 이탈해버리면 그만이라 편곤 자체의 단점도 상쇄할 수 있었다. 이때 기병이 사용하는 [[마상편곤]]은 양손으로 휘두르는 장병기에 속하는 보병의 편곤과 달리 기병이 마상에서 휘두르기 쉽게 한 손 무기처럼 짧아진 것이 많다. 이후 편곤의 중요성은 [[인조]] 때까지 강조되어 적진을 뚫는 데는 편곤만 한 게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실제로 인조 정권은 [[이괄의 난]] 당시 편곤으로 무장한 이괄 휘하의 기병들에게 탈탈 털린 경험이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환도(무기)|환도]] 없이 활과 편곤만 장비하는 기병도 많았다. [[하멜 표류기]]에도 언급된 이야기다. 고고학 자료로는 고구려 국내성 유적에 둔기 타격부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온 적 있어 사실 비슷한 무기류는 이미 이때부터도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당시 삼국이 전쟁이 격화하고, 중장화하면서 화살촉도 관통 능력이 좋은 형태로 변하는 양상이 관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