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견회의 (문단 편집) === 국방개혁의 필요성 === >"우리의 현재 군비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총액 3억원에 달한다. 실제는 다시 각 지방의 군대가 징수하는 것도 있고 이 밖에 어느 정도 액수가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3억원만 해도 이미 어쩔 도리가 없는 액수이다. [[GDP대비 국방비 3퍼센트|군비가 전 국가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면 그 국가는 반드시 파산한다. 만일 90%에 달하면 멸망한 것과 같다.]] 현재 우리 군비의 총액은 이미 80%를 초과하고 있다. 우리 국가는 건설을 할 수 없고 경제적 기초도 전혀 없다. 민생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은 국가는 완전히 멸망한 것과 같다. 우리는 지금 국가지출의 최대 부문인 군비를 해결해야만 국가경제를 안정시킬 수가 있다. 경제가 안정된 후 정치와 사회도 비로소 궤도에 오르는 것이다." [* 서문당 중국현대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수입이 4억 5천만 원인데 이중 외채 상환에 1억원, 군비에 3억원을 쓰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 >1928년 12월, 장제스 <북벌 성공 후의 가장 긴요한 공작>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끝에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연합군은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했고 안국군 대원수 [[장쭤린]]이 만주로 퇴각하다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북벌은 국민당의 승리로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도 고민 끝에 [[국민정부]] 휘하에 [[동북역치|복속되길 선택하면서]] 표면적인 중국 통일이 완성되었다. 북벌 직후 국민당 산하에는 84개군, 300여개 사단, 160~200만 대군이 있었는데 장제스 휘하에 50만, [[펑위샹]] 휘하에 42만, [[옌시산]] 휘하에 30만, [[리쭝런]] 휘하에 30만, 광동파 [[리지선]] 휘하에 15만, 사천파와 운남파가 20만, 동북군 휘하가 16만 정도 되었다. 장제스는 개별적인 군벌들과는 세력상 우세에 있었으나 여러 군벌들이 힘을 합칠 경우에는 손쉽게 열세에 놓일 터였다. 당장 펑위샹과 옌시산만 힘을 합쳐도 장제스를 압도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군벌들 산하의 병력을 감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장제스의 의도는 북벌 와중인 1928년 5월에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북벌군이 석가장을 점령하고 베이징으로 전진하던 중 장제스는 절강성에 공장을 건설하여 5만명의 전직군인을 노동자로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대 감축의 계획을 드러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지나치게 많은 숫자의 군대를 줄여 병력을 정예화하고 경제개발과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는 경제적인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