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편견회의 (문단 편집) == 결말 == 이후 중국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허잉친은 제1집단군이 13개 사단, 24만명, 2집단군이 12개 사단 22만명, 3집단군이 12개 사단 20만명, 4집단군이 13개 사단 20만명으로 감축되었다고 했고 장제스가 삼전대회군사보고에서 1집단군이 20만 5천명, 2집단군이 26만 9천명, 3집단군이 22만 6500명, 제4집단군이 13개 사단으로 편견되었다고 했으나 아무런 점검을 거치지 않은 서류상의 보고일 뿐으로 신빙성이 결여된 보고였다. 1929년 8월 편견회의 보고에는 5개 주요 편견구의 군대수가 최소 160만여명이며 여기에 6편견구인 사천, 운남, 귀주를 합쳐 200만이 넘는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3차 전국대표대회는 국군의 최고 통수권이 완전히 국민정부에 속한다고 선포했지만 이는 오로지 말로만 그러할 뿐이었다. 여기에 펑위샹, 장제스의 갈등이 호남사건과 산동접수를 놓고 격화되면서 중국의 불안정이 심화되었고 결국 [[반장전쟁]]이라는 초대형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편견회의의 결론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군벌들의 비협조와 불참, 반발 속에 실질적인 편견작업은 행해지지 못하였고 1929년 10월 15일의 36차 상무회의 이후로 오랫동안 편견회의가 열리지도 못하였다. 겨우 열리게 된 37차 회의에서 편견회의의 대폭 감축이 결정되었고 1929년 12월 15일에 열린 38차 상무회의는 편견회의의 해체를 공식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