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레 (문단 편집) == 여담 == * 1967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파일:GOL-DE-PLACA_ARQUIVO.jpg|width=100%]]|| ||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있는 기념판 || * 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모두가 알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거나 퇴장을 당하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투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 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투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투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실제 경기로는 1964년 1월 19일, [[산투스 FC]]와 [[그레미우]]의 타사 브라지우 4강 2차전에서 경기 86분에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했다. 산투스는 그 대책으로 펠레를 골키퍼로 뛰게 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이미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골키퍼로도 여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결승으로 이끌었다.[[https://www.fmkorea.com/1479293654|참고하면 좋은 에펨코리아 글]] 이런 식으로 펠레가 골키퍼로서 뛴 기록은 놀라운 수준이다. 공식 경기와 비공식 경기를 합쳐 골키퍼 대신 뛴 경기가 7경기나 되는데, 실점은 단 한 개 뿐이다. ||[[파일:pelegoalkeeperin19640119.jpg|width=100%]]|| || 퇴장당한 지우마르의 유니폼을 빌려 입은 펠레 || ||[youtube(J8xgrOuwpyY)]|| || 펠레의 골키핑 능력 ||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 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의 일이다. 그 날 따라 수비수들이 펠레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고 평소에 매너 좋은 펠레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러다 펠레가 파울을 당했지만 심판이 오히려 펠레에게 파울을 선언했고 펠레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심판은 이런 펠레에게 퇴장을 주었는데 펠레가 이렇게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오히려 주심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관중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펠레보러 비싼 돈 주고 표 사서 경기보러 왔는데 펠레를 퇴장시켜? 장난하니?" 결국 남은 경기는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시켜야만했다. 그리고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중징계를 받았다. * 펠레가 아프리카로 투어를 갔을 때의 일이다. 펠레는 그 날따라 엄청난 팬들의 환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선 경기를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인데 그 이후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펠레는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각종 묘기들을 선보이며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골 폭풍을 쏟아부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환호성이 커질수록 상대팀 수비수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골키퍼는 아예 경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펠레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저 골키퍼도 가족들이 있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을텐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있는 힘껏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게다가 본인의 서브 포지션이 골키퍼였기 때문에 골을 먹었을 때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펠레는 골키퍼에게 사과하러 상대팀 라커룸에 방문했지만 골키퍼는 펠레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인터컨티넨탈컵]]에서 [[SL 벤피카]]를 깨박살내자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유럽의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 펠레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때 이적료로 [[백지수표]]를 준비했다는 구단도 있다고 한다.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토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월드컵에서 3번을 우승하여 월드컵의 대명사같은 선수지만 실제로 부상 또는 부상의 후유증이 없는 풀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뛰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대영제국 훈장 2등급 [[훈장(상훈)/영국|명예장]](honarary KBE)을 받았다. 명예장이긴 하지만 현재 축구계의 현역출신 유일한 KBE 수훈자다.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96701&term=%C6%E7%B7%B9+%B0%AD%B5%B5&query=%C6%E7%B7%B9+%B0%AD%B5%B5&menu=cview&encrt=yMv92a150wbTmEjYMDE1NCZzZWNzdWJudW09ODU=#middle_tab|#]]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http://v.daum.net/link/1357898|#]] * 펠레가 청소년일 적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었기에 그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포도주|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았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았다고 한다. * 펠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계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한 빛나는 발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자신의 발 모양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못생겼다고. 축구선수들의 발이 못생긴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펠레는 특히 심하다. 발마디의 굳은 살은 기본이고 발톱도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밑의 사진은 현재 일반에 유일하게 공개된 펠레의 맨발 사진이며 이것 역시 펠레 본인이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다. || [[파일:펠레 맨발.jpg|width=100%]] || || 펠레의 맨발 사진 || * 아들 에지뉴도 축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이 아들내미가 [[호부견자|마약이나 팔고 다니는 사고뭉치]]여서 펠레의 속을 꽤나 썩혔다. 막내아들인 1996년생 조슈아도 산투스 FC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2015년 미국의 탬파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면서 축구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생전에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하곤 했다. 애초에 펠레의 조국 브라질은 지금도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라 갈 수 밖에 없었다. *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은 16강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를 만났다. 당시 물이 올라와 있던 펠레와 브라질 선수들은 자신만만했으나, 브라질은 고작 1골을 넣고 진땀승을 거뒀다. 왜 '고작'이냐하면, 당시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6전 전승을 하고 조별리그 1차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4-1로 이겼던 강팀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펠레의 골이나 다름없는 헤더를 막아내는 역대급 선방을 보여줬다. 경기가 끝나고 펠레는 "잉글랜드 골문은 은행(Banks)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라는 드립을 남겼다.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맞아 [[삼성전자]]에서 펠레가 등장한 [[파브]](PAVV) 텔레비전 CF를 제작했다. || [youtube(_IP_WpDrtAM)] || || 펠레가 출연한 삼성전자 파브(PAVV) 텔레비전 CF ||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펠레의 저주|빗나가는 예측]]을 자주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 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 펠레는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는 1981년에 개봉되었다. 여기에는 영화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막스 폰 시도우]] 등이 출연했으며 펠레 외에도 [[보비 무어]]등의 유명 축구 선수들이 출연했었다. 스토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장교들이 선전용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표팀과 자신들의 정예 축구팀과의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포로 대표팀 선수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데스메치로 알려져 있는 [[FC start]] 선수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1986년에는 핫샷(Hotshot)이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형편없던 실력의 한 젊은 미국 리그 축구선수가 펠레를 찾아가 수련을 받은 후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대한민국에선 [[SBS]]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발롱도르|2013년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면서 펠레도 [[명예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펠레가 뛰던 당시 발롱도르는 유럽 국적의 선수들만 수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펠레는 그런 활약을 하고도 수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은 3번째 명예 발롱도르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 펠레가 선수 시절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면 [[http://sports.new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076&aid=0002853345|7회]]를 수상했을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 아닌 프랑스 풋볼[* 발롱도르가 FIFA 발롱도르로 합쳐지기 전에 수상자를 선정하던 기관이다.]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나름 의미가 있는 기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58년~1961년까지 4회, 이후 1963, 1964, 1970년 수상이다. *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 '라 노체 델 디에스(10시의 밤)'에 펠레가 첫 초청자이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평소에 축구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다른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라도나는 쇼 도중에 먼저 헤더 대결(서로에게 헤더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했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는데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마라도나에게서 한 30cm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직행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youtube(sSRz3IZKhUg, width=420, height=315)]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선수.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인.jpg|width=100%]]}}}||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16년 3월, [[삼성전자]]를 상대로 3000만달러(한화 약 350억원)의 [[http://sports.new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003&aid=0007130681|소송을 걸었다.]] [youtube(FweA7YD1XUU)] * [[카포에라]]를 익힌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세이부 컵 축구]]의 최종보스인 GOD 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1~7스테이지에서는 부심으로 뛰다 8스테이지에서 선수로 돌변하여 경기장에 난입한다. [[파일:seibugod.png]] * [[대한민국]]과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2년 선수로서 한국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https://youtu.be/SkkTOmVd8hM|대한뉴스]] 친선 경기에서 펠레가 속한 산투스 팀이 3:2로 이겼다. 1998년에도 방한했다. 부산에서 열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도 참여했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팀에 대해 좋은 멘트를 많이 남겼다. 브라질에 있는 펠레가 만든 팀인 리토라우FC에서 10번을 달고 뛰던 한국 축구 선수 임규혁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피스컵]] 대회 고문 및 홍보대사를 맡아 방한한 적이 있다. 피스컵은 열혈 축빠이기도 했던 [[문선명]]이 처음 개최한 것이며, 당시 펠레도 취지에 공감해 여러가지 지원 및 자문을 했었다. 2012년 문선명 사망때는 펠레가 직접 조전을 보내기도 했다. * [[바비 찰튼]]도 언급한 바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17살때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묻는 질문에 나라고 대답했으며, 세계 최고의 윙어를 묻자 그것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선수였다면 농담이라고 웃었겠지만, 펠레는 진정으로 믿고 대답했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누구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http://www.goal.com/en/news/584/brazil/2010/10/23/2179194/pele-birthday-special-the-1958-column-by-nelson-rodrigues|#]] * 펠레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명하다. 펠레는 1958년 월드컵 개최 당시 17세의 유망주였기 때문에 그가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 주축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발렌티노 마촐라]]를 닮은 플레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해질 [[조제 알타피니]]도 있었고 여러모로 펠레가 낄 자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통념상 10번은 다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타당해 보였는데, 당시의[* 앞선 7번 주석에서 브라질이 등번호 작성을 잊어서 FIFA 직원이 랜덤 배정했다는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 둘을 종합해보면 등번호 제출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팀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이례적으로 3번을 달고 뛰었고([[https://en.wikipedia.org/wiki/1958_FIFA_World_Cup_squads#Brazil|다른 팀 다 멀쩡한 와중에 브라질만 골키퍼가 3번을 달았다.다행히도 후보 골키퍼였던 카스티유가 정상적으로 1번을 받았다.]]), 8번이나 10번을 받을 팀의 플레이메이커 [[지지(축구선수)|지지]]는 6번을 받고(지지는 전 대회인 1954년 월드컵에서 8번을 달았었다), 라이트 윙이 아닌 레프트 윙어 [[마리우 자갈루]]가 7번을 받고 반대로 라이트 윙인 [[가린샤]]가 11번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페렌츠 푸스카스]],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같은 스타 선수나 달 수 있었던, 팀의 핵심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돌아가야 할 10번의 영광이 뜬금없게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망주에 불과했던 펠레에게 주어진 것이다. 펠레로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10번이었지만 이 10번 셔츠를 입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10대 선수가 되는 바람에 이후에도 그 번호를 계속 달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도 펠레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면 누구도 그의 등번호를 달 수 없었고 그의 은퇴 후엔 [[호베르투 히벨리누]], [[지쿠]], [[하이(축구선수)|하이]], [[히바우두]], [[카카]], [[네이마르 주니오르]] 등으로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 그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축구선수인 마라도나가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좋은 이미지가 강하다. 펠레는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시절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되어 국정에도 참여하였다. * 2012년에 브라질의 방송사 SBT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에서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스포츠인 중에는 6위의 [[아일톤 세나]]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축구선주 중에서는 제일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youtube(IvOL8gT_C1U)] * 2016년에 '펠레: 버스 오브 어 레전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빈센트 도노프리오]] 등 유명한 배우도 출연했고, 펠레의 가족들이나 펠레 역할의 배우는 실제로 [[브라질인]]을 캐스팅하였다. 펠레의 어린 시절 삶과 1958년 월드컵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린샤가 펠레보다 키가 큰 점 등 잘못된 고증이 조금 있지만, 펠레의 유년기 삶과 브라질 축구계의 분위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볼 만한 영화이다. 펠레 본인이 직접 마지막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것도 포르투갈어가 아닌 영어로 했다. 참고로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잠시 비춰지는 장면이 있는데 펠레 본인이 카메오 출연한 것이다. * 명성에 걸맞지 않게 피파 시리즈에서는 키가 작아서 저평가받는다. 나올 때마다 다른 스탯은 좋지만 오직 키때문에 [[호나우두]], [[호나우지뉴]]보다 저평가 받는 수준. 라이벌 마라도나는 라이선스 만료로 게임상에서 사라져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피파 온라인 4에서는 스탯이 사기적이라 성능은 보장되지만 하필 팀 케미스트리 시스템 때문에 비인기 매물이다. 가능한 팀이라곤 산투스 FC와 뉴욕 코스모스 FC, 브라질 국가대표팀 단 셋 뿐인데 브라질 국대를 제외하곤 한국인들에겐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수비쪽이 부실해서 돈을 많이 써야 하는 팀이라 역시 비인기다.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로 시상이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스트라이커 대신 미드필더 포지션에 이름이 올랐다는 점이 논란이 되긴 했으나, 선정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올타임 드림팀 선정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파일:70ecd18d4f5b914cf2bff03fe78179cbb436fc57889396ed37751d54f40a6877544608d4164e50ad53d3aface2d8ede8895aa18.jpg]] * 바로 위 상위 문단에 그가 탄생시킨 펠레의 저주라는 한때 월드컵에서 빼놓을 수가 없던 대표적인 징크스로 인하여 한국같은 나라에서 누구의 별명이 "펠레다"라고 한다면, 그건 축구에 천재인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예측하면 무조건 실제로는 정반대로 일어나게 되는 사람을 칭하는 별명이 되버리기도 했다. * 포르투갈어 사전 '미샤엘리스 사전'은 '펠레'(Pelé)가 "비범한 사람, 또는 그의 자질, 가치 또는 우월성 덕에 펠레와 같이 그 무엇이나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사전에 추가됐다.[[https://m.yna.co.kr/view/AKR20230427132600009?section=international/all|#]] [[분류:펠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