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제타이로이 (문단 편집) == 역사 == [[필리포스 2세]] 때 군제 [[개혁]]으로 모습을 드러낸 페제타이로이는 완전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였다. 이들은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펼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의 '''모루''' 역할을 완벽히 해내며 화려한 데뷔전을 펼친다. 이후 그들의 진정한 활약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 정벌에서 나타난다. [[알렉산드로스 3세]]를 만나기 이전,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주로 [[전차]]와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전술을 펼쳤고, 보병대는 창, 검, 도끼, 화살 같은 무기로 무장해 전방의 기병이나 전차를 지원하는 동시에 적 보병이 무너지면 돌격하여 전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원거리서 활로 공격 한 뒤에 도끼나 창, 검으로 근접전을 시도하다 보니 페르시아군 보병대는 방호구에 그렇게 많이 투자하지 않았고[* 갑옷 정도는 있었지만, 투구나 [[정강이]] 보호대가 없었으며, 방패도 [[버드나무]]로 짜서 만든 방패가 전부였다.] 그 결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구, 방패, 정강이 보호대로 중무장한 그리스 동맹군의 [[호플리테스]]에게 근접전에서 [[마라톤 전투|일방적으로]] [[테르모필레 전투|얻어터지기]] [[플라타이아이 전투|일쑤였다.]] 그렇다보니 후기 페르시아 제국군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동맹의 호플리테스에게 호되게 당한 교훈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호플리테스 마냥 2~3m 가량의 장창과 그리스식 호플론을 든 카르다카(Kardaka)라 불리는 중장보병 집단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아나바시스]]》에서 나온 것 처럼 [[그리스]]에서 호플리테스를 [[용병]]으로 불러와 카르다카랑 같이 전방에 배치해 운용하기도 했다. 다만 4~5m 짜리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는 마케도니아군의 팔랑기테스 앞에서는 호플리테스고 카르다카고 결과는 [[끔살]] 밖에 없었다. 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가 무장한 [[사리사]]는 창의 무게와 보병이 앞으로 달려나가[* 이 방식을 오티스모스(Οθισμός)라 부른다. 마케도니아군의 팔랑기테스는 그리스 호플리테스가 쓰던 방식처럼 적을 밀어 붙이는 전술을 썼는데, 물론 방패로 밀어붙인다는 것이 아니라 긴 창으로 창의 사정거리 내에 든 적을 쓰러트리며 밀어붙인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찌르는 무기인데 창 자체의 무게와 보병이 앞으로 달러나가면서 나오는 순간적인 힘이 더해져 무지막지한 위력을 보였고, 기껏해야 3m 길이의 창을 가진 카르다카나 호플리테스는 4m 이상의 사리사를 든 팔랑기테스에게 상대가 되지 못 했다. 마케도니아군은 이렇게 팔랑기테스 부대가 '''모루'''로써 적 보병을 분쇄하고 [[헤타이로이]]가 팔랑기테스에 압도당하는 적 부대를 후방에서 두들기는 '''망치'''의 역할로 적들을 분쇄해 나갔고, 마케도니아군은 [[그라니코스 전투]],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이소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히다스페스 전투]] 같은 큰 규모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인도]] • [[중앙아시아]]를 정벌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엔 [[페르시아인]]들이 많이 입대하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헬레니즘]] 군대의 중장보병으로 자리잡은 페제타이로이는 형태가 조금씩 바뀌면서 [[디아도코이]]들에게도 애용되었으나, [[로마 공화국]]의 정벌에 [[디아도코이]]들이 몰락[* [[셀레우코스 제국]]은 B.C.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직할 [[속주]]가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0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멸망했다.]하면서 함께 자취를 감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