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리클레스 (문단 편집) ===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페리클레스의 죽음 === 기원전 433년, [[아테네]]는 메가라 법령을 발표한다. 이는 아테네가 막강한 해군력을 이용해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의 해상을 봉쇄하는 법령이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경제를 옥죔으로서 스파르타의 동맹 도시 국가들을 아테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스파르타는 대표단을 보내 메가라 법령을 철회하고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을 즉각 추방할 것을 주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스파르타의 제안은 분명하게 아테네 시민과 페리클레스의 대립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이 일로 양보를 하면, 스파르타는 분명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해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켰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에 역으로 제안을 했다. 메가라 법령을 철회하는 대신, [[스파르타]]는 자국 영토에서 주기적으로 외국인을 추방하는 관습(크세넬라시아)를 버리고, 자국 동맹 도시의 자치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테네의 요구는 스파르타에 상주하는 '''아테네인'''들이 상권 장악을 통해 스파르타의 이익을 줄이고, 스파르타로부터 자치권을 받은 [[도시국가]]들을 해상 봉쇄로 경제 제재를 가해 아테네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이었다. 스파르타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양측 모두 물너나려 하지 않자 전쟁이 발발한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해 모든 시민들을 아테네 성곽 안으로 피신시킨다. 스파르타가 과거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요새 밖을 무차별적으로 유린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터전을 떠나는 데 동의하긴 하였으나 여러 농촌 주민들은 페리클레스의 결정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군대는 아테네의 농장에 방화하고 돌을 뿌리는등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아테네의 농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페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페리클레스에게 즉각적인 반격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민회가 열리자 페리클레스는 대중들을 설득해 적극적 교전보다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 근방에 남아있는 동안에 아테네 군함 100척이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으로 보내어 약탈하고, 기병대를 배치하여 도성과 가까운 곳에서 약탈당한 농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으로 끝내도록 하였다.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 군대는 두 번째로 [[아테네]] 근방을 대규모 약탈하였으나, 페리클레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극적인 버티기 전략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아테네에 대규모 시민들이 밀집되어 생활하자 전염병이 발생한다. 이 역병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보로는 장티푸스, 천연두, 페스트(흑사병) 등이 추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전염병으로 인해 도시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어떻게든 대중들을 설득해 혼란을 잠식시키려고 하였으나, 결국엔 정적들에게 기소당해 장군직을 박탈당한다. 1년 후, 그는 민회를 통해 기소당했던 죄를 용서 받고 아테네의 총사령관으로 복귀한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29년 동안에 모든 군사 작전을 총괄하다가 그 해 가을에 역병으로 사망한다. 페리클레스의 두 아들 또한 전염병으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