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니키아 (문단 편집) == 탐험 == 페니키아인들은 갤리선으로 탐험도 많이 다녔으며,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을 받고 최초로 [[아프리카]]를 일주하며 [[희망봉]]을 돌아본 민족이기도 하다. [[헤로도토스]]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정오에 해가 북쪽에 떠 있었다'''니 거짓말인 거 같아서 믿기 힘들다"고 부연했는데 역설적으로 오늘날 이 기록은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한 명확한 증거가 되고 있다. [[적도]]를 지나 [[남반구]]로 들어가면 [[정오]]에 해가 북쪽에 보이기 때문이다.[* [[북회귀선]]이남으로 내려가면 1년 중에 해가 정오에 천정보다 북쪽에 위치하는 날이 생긴다. 북회귀선에서 하짓날 정오에 태양이 천정에 위치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항해 중에 [[밀]]을 심어서 수확하는 근성을 보이며 2년 만에 아프리카를 일주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항해 방향이 훗날 [[포르투갈]]의 인도 개척 방로와 반대방향이었다는 것. 이집트 파라오의 의뢰를 받고 홍해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아프리카를 돌았으며,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에도 기록된 내용이다.[* 여담으로 우연인지 아니면 진짜 관계가 있는건지 후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프리카를 쭉 돌아 카르타고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때의 계획한 침공 루트도 방향은 같다.] 당시 사람들은 새를 육지에 날리거나 섬에 있는 특이한 구름의 형태, 밤하늘의 별로 위치를 파악했다고 하는데 천문관측과 조수간만의 차이, 조류의 흐름에 대한 전문지식하에 항해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 원양항해와 야간항해를 최초로 성공시켰다. 천문항해술을 발전시켜 별의 위치에 대한 법칙을 발견해 장기간 항해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항해에 가장 중요한 세 요소인 조선술, 항해술, 천체술 3박자를 모두 갖춘 자들로 갤리선을 처음 만들었다는 점에서 조선술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이들은 지중해를 돌아다니는 걸 넘어서 홍해, 인도양, 대서양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했다. 주석을 찾기 위해 브리튼 섬까지 오갔고,[* 콘월에 거대한 주석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금을 주고 사들였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지중해에서 청동기 문화가 번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구리는 그렇다 쳐도 주석은 지중해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고, 페니키아 땅에는 아예 안 났다. 그래서 저 먼 데까지 갔던 것.] 호박과 모피를 찾아 발트 해에 있는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오갔다고 한다. 발트 해의 파도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인간들이라고밖에 거기다 당대 지중해인들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항해하기를 꺼렸으나[* 일설에 그 이남은 낭떠러지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랬다기보다는 당대 [[지중해]]인들에게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할 기술이 없었던 탓이 매우 크다. 페니키아인들 이전에도 [[북유럽]]까지 가서 [[호박(보석)|호박]]이나, 청동기의 원료가 되는 [[주석(원소)|주석]]을 구하러 가기는 했지만, 그때는 당대 항해술의 한계로 인해 해로를 이용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한 채 육로로만 가곤 했다.] 그리스인 曰, 금을 찾아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다른 도시국가들과 달리 상업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대 지중해에서 항해술이 알아주다 보니, 외국에서는 무언가 항해를 맡길 일이 있으면 페니키아인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또 [[티레]]의 최전성기를 이끈 기원전 950년 무렵 히람 1세는 [[솔로몬]] 왕과 경제동맹을 맺고 함께 동방진출을 시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홍해 항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인연 때문에 이후에도 티레와 이스라엘은 동방 진출에 한해서 함께했는데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중해를 호수처럼 누비고 사방팔방 진출하며 번성했다. 믿긴 어렵겠지만 페니키아인들이 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는 설(!!!)도 있다. 탐험가 히밀코의 항해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히밀코라는 사람은 아프리카 최남단 항해를 했던(희망봉까지 갔다)[* 이집트 파라오가 본래 우리가 잘 아는 나일강 대운하를 건설하려다 비용 문제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 대신 페니키아 인들을 고용해 새 항로를 찾고, 아프리카 대륙이 바다로 둘러싸였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도 해보라 했다. 페니키아 인들이 파라오의 지원하에 연안 항해로 진출한 것이다. 이때 남반구에서 정오에 태양이 북쪽에 있음을 확인했다.] 한노[* 아프리카 항해를 나섰던 사람으로 가는 김에 아프리카 연안 지대에다 도시도 몇 개 건설했는데, 이 도시들은 5세기에도 존속했다고 한다. 한노는 아프리카의 침팬지 내지는 고릴라와 싸움을 벌여 가죽을 벗기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을 제외한 유인원들은 모두 지구력을 제외하면 전투력이 괴수다.]보다 앞선 시기 북대서양 항해를 했으며 주석 찾으러 북쪽에 갔다 브리튼 섬을 발견한 그 사람이다. > 이 바다는 항해하는 데 무려 넉 달이나 걸렸다. 바다가 너무 넓어서 바람의 힘으로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없었고, 바닷물은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또한 여울 사이에 해초들이 튀어 나왔는데, 그 해초가 마치 덤불처럼 우거져서 배가 걸릴 지경이었다. 바닷물은 깊지 않아서 바닥에는 얼마 안되는 물이 간신히 차 있을 뿐이었다. 바다의 야생동물들이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배 사이로 바다괴물들이...(중략) 몇몇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 대목은 바하마 제도의 얕은 사구와 흡사하고, 항해에 넉 달이나 걸렸다고 하니,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라고 본다. 당대 헤라클레스 기둥이라 불린 카나리아 제도에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자리잡아 있었는데 [[카르트 하다쉬트]]인들과 카나리아 제도 사이에 살던 페니키아인들은 카나리아 제도 너머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카르타고 주화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묘사되었다고도 한다.[[https://phoenicia.org/america.html|#]] 다만,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서아프리카]]나 [[서유럽]] 지역으로 항해한 기록을 곡해한 결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으로 항해하는 중에 경유해 갈 수 있는 곳 중에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바다나 [[도버 해협]], [[지브롤터 해협]],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의 앞바다, [[카나리아 제도]] 및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 지역 등,[* 위에서 말한 배타고 [[적도]]를 넘어 [[희망봉]]에 도달했다는 기록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참고로 히밀코와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 한노는 [[아프리카]] 대륙을 [[대서양]] 쪽 방향으로 해서 서쪽 해안을 따라서 항해했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카메룬]] 앞바다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여담으로 히밀코나 한노가 뭔 수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고대의 항해 기술만으로 탐험하는 데 성공했느냐면, 그냥 곡식 씨앗을 배에 왕창 실은 다음 정박하는 곳마다 농사를 지어서 수확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한 덕이라고 한다. 이 또한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내용이다.] 기록에서 언급하는 지리적 특징을 만족하는 곳이 꽤 있기 때문이다. [[인도양]]을 횡단하는 항해에 대한 기록이라는 설도 있는데, 서기 8세기경까지는 기후 및 항해 기술의 문제로 인도양을 직접 횡단하는 건 꿈도 못 꾸고 연안 항해밖에 하지 못했으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인도양]]을 어찌 알았냐는 주장도 있으나, 동지중해권 문명은 기원전 1000년부터 이미 홍해 해로와 페르시아 육로를 통해 인도와 교류하고 있었다. 가령 [[계피]]와 같은 인도산 향신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는 대부분이 고대 [[타밀어]]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이후로는 후자의 페르시아 육로가 더욱 애용되었다. 물론 전자의 방법도 자주 애용되었기에, 당시 [[인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였던 [[예멘]]은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라비아 반도|아라비아]] 펠릭스'라고 불리면서, 막대한 부로 흥청거렸던 중개 무역지였다.] [[이집트]]의 [[미라]] 중에는 [[담배]], [[코카인]] 반응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의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라서 페니키아가 아메리카와 교류했다는 주장이 잠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현재는 부정되고 있는데, 후속 연구에 의하면 미라에서 확인된 담배나 코카인은 실제로는 발굴에 동원되었던 이집트인 인부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일단 [[아메리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에도 대거 진출 기록이 있는데, [[바이킹]] 사람들은 [[방해석]] 결정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그린란드]]와 [[캐나다]]를 드나들었고, [[스페인]] 북서부의 [[바스크]]인 어부들도 캐나다에서 [[대구(어류)|대구]]와 [[고래]]를 잡아왔다. 다만, [[바스크|바스크족]] 포경업자들이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분명한 증거인 [[레드 베이]] 포경기지 때문에, 이들이 16세기 이전에 아메리카에 갔을 가능성은 오히려 부정되었다. [[뉴펀들랜드]]에 있는 이 유적지를 [[방사능 연대측정]]을 통해 조사한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오래 잡아도 1530년 이후에나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보다 훨씬 앞선 1497년에 [[제노바 공화국]] 출신 [[잉글랜드]]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영어]]식 이름은 존 캐벗)가 이 유적지가 있는 [[뉴펀들랜드]]에 도달한 바 있으므로, [[바스크]]인의 [[아메리카]] 도달은 이들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시기에나 이뤄진 것이다. 즉, 페니키아인들에 비해 원양 항해 능력이 더 우월한 후대의 탐험가들도 11세기쯤에나 아메리카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조차도 한두 번 정도만 방문한 단발성 항해였으므로 16세기 이전까지는 지속적으로 교류하거나 탐험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페니키아가 아메리카와 교류했을 가능성은 전면 부정되는 것이다. 다만 페니키아인들의 교역은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교역은 아니었다고 한다. 항로를 알고 있는 극히 일부의 상인들만 특정 상품을 취급했는데 페니키아인들의 주 교역은 '침묵의 거래'였다. 원주민이 해안에 상품을 놓고 물러나면, 페니키아인들이 보고 그에 걸맞은 [[금]]이나 상품을 내려놓고 가져가는 ~~[[사회적 거리두기]]~~식으로, 이런 식이라면 직접적인 접촉은 드물었을 것이고 교역지의 기록이나 유물도 드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미지의 존재와 교류한 이야기로서 하나의 [[전설]]로서 구전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홋카이도]] 본토의 [[아이누족]]들이 [[쿠릴 열도]]의 [[쿠릴 아이누|친척 부족]]들을 목격한 것이 와전된 [[크로복클]] 전설이나, [[그리스인]]들이 [[인도이란어파]] 계열의 [[유목|유목민]]을 목격한 것이 와전된 [[켄타우로스]] 설화 등이 대표적이며, 현대의 [[미접촉부족]]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화물 신앙]]도 현대 문명의 이기의 산물인 [[비행기]]나 [[군함]], [[헬리콥터]]를 본 부족민들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신앙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히밀코에게 [[아프리카]] 대륙 일주 탐험을 의뢰한 [[파라오]]가 들은 소문에서 보듯이, 페니키아인들 이전에 누군가 아프리카 대륙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발견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집트]]가 속해있던 [[북아프리카]] 지역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끼리는 [[베르베르인]]같은 북아프리카나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유목|유목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교류가 이뤄져왔으므로, 이들의 목격담을 취합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입수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를 토대로 아프리카 대륙의 형태를 대강 유추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