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위샹 (문단 편집) == 여담 ==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불상을 파괴하거나 절을 공격하는 훼불 행위를 자주 저질러 악명을 얻었으며 우페이푸는 이를 두고 그를 빨갱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8년엔 [[소림사]]에 불을 질러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병사들에게 소방 호스로 세례를 줬던 일화도 매우 유명하다. 그의 부하들 중에 [[오호대장군]]과 비슷하게 "서북군 5호장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유능한 부하가 있었다. 이들은 장지강(张之江), 정금성(郑金声), [[송철원]](宋哲元), 녹종린(鹿鐘麟), 유욱분(劉郁芬)인데, 이중 유욱분은 왕징웨이정권에 붙어 [[한간]]이 되었다. 1927년 7월 장제스와 회동하였을 때 장제스는 농민처럼 너무도 초라하게 입고 나온 펑위샹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축을 운반하는 유개 [[화차(철도)|화차]]에 걸터앉은 펑위샹에게 "펑 최고사령관은 어디 계시나?"라고 묻자 펑위샹이 웃으면서 "내가 펑위샹이오."라고 대답했고 펑위샹을 만나러 왔던 장제스, 리쭝런을 비롯한 국민당 소속 장령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한다. 하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와의 회담에서 그랬듯이 쉬저우로 이동하는 내내 급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여행을 하다가 장제스와 만나기 직전 급히 변장한 것이었다. 다만 펑위상은 당시 일반적인 군벌들의 행태와는 달리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특유의 풍채 있는, 탐욕적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사생활은 청교도적이었고, 그의 군대도 규율도 잘 잡혀 있었고 훈련도 잘 되어 있었다. 그가 거느린 "국민군"은 [[중원대전]] 직전 22만 명까지 늘어났지만 전쟁의 패배로 와해되었다. 펑위샹은 영지에서도 [[옌시산]]처럼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다만 옌시산과는 달리 본거지라고 할 만한 영지가 없었기 때문에 [[반장전쟁]] 후로는 근거지가 없어서 군벌로서 결국 생명을 다한다. 그나마 올곧고 개혁적인 성향이지만 펑위샹도 군벌인지라 배신과 야합을 밥먹듯 했고 배반 장군이란 별명도 있었다. 본인이 배신을 너무 잘했는지, 부하들도 충성심이 별로 없었고, 그의 몰락에는 부하들의 배신도 한 몫 했는데, 결정적인 것은 [[반장전쟁]] 당시 심복 [[한푸쥐]]가 배신해서 장제스에 편에 붙은 것이었다. 만약 그때 한푸쥐가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장제스를 하야시키고 중국의 지배자로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펑위샹의 딸은 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 유학을 했는데 그녀가 잠시 사귀었던 남자가 바로 [[장징궈]]였다. [[덩샤오핑]]이 잠시 펑위샹의 정치부 교관을 맡은 적이 있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장제스 휘아에서는 국민당원으로 활동하던 공산당원은 체포-처형되었는데, 펑위샹은 자기 휘하의 공산당원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덩샤오핑은 펑위샹이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의 목을 쳤듯이 자신들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우릴 공손히 돌려보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군벌들 중에서 이례적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존경하여 미국 방문 시에 그의 집을 찾아 미망인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다. 총 2번 결혼하여 3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낳았다. 훗날 중공에서 우대받은 리더취안은 두번째 아내다. 두번째 아내의 소생인 펑훙다와 펑리다(딸)는 각각 소련,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인민해방군 해군 및 군의관으로 일했으며 둘 모두 소장까지 이르렀다. 이외에도 공산당에 동조적이었던 것이 덕을 보았는지 자손들이 [[태자당]] 대접을 받아 중국에서 매우 출세한 사람이 많다. 손자중 한명인 펑단위(펑훙다의 아들)는 해군 중장으로 2023년 현재 인민해방군 해군 부사령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