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위샹 (문단 편집) === 군벌의 길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Feng_Yuxiang2.jpg]]|| || 1920년대 초의 펑위샹 || 펑위샹은 자신을 등처먹었는데다가 부정부패에 찌든 우페이푸를 매우 증오했는데, 장쭤린이 돤치루이, [[쑨원]]과 손잡고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내자 주저없이 손을 잡았다. 일찍이 하남 독군이 되었을때 펑위샹은 원래는 자신과 같이 우페이푸 휘하인 군벌 포더전(鮑德全)이 짜오티의 동생인 짜오제이(趙杰)와 결탁하고 자신을 배신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음에도 우페이푸와 친하단 이유로 처벌도 안 받는 것을 보고 여러모로 원한이 많았다.[* 이 포더전은 은근슬쩍 다시 펑위샹에게 붙으려 했으나 펑위샹은 그를 총살해버리고 이를 추궁하는 우페이푸에게 난군에게 맞아 죽은 모양이다 라고 둘러댔다.] 우페이푸는 [[회선 사건]]과 무리한 남방 원정으로 피해가 막심했고, 이 때문에 그의 파벌인 직계 안에서도 그를 경원하는 눈빛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1924년 10월 2차 직봉전쟁이 터졌을 때 우페이푸는 펑위샹을 직예군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장쭤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펑위샹은 그 말을 듣는 척, 휘하의 11사단을 거느리고 짐짓 러허성을 공격하는 체 하다가 10월 20일 총부리를 돌려 베이징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펑위샹이 자신을 국민군이라 칭하며 우페이푸에게서 독립하자, 1사단장 후징이(胡景翼)와 15혼성여단장 쑨웨(孙岳)가 동조했다. 펑위샹은 녹종린, [[한푸쥐]], [[스여우싼]] 등을 이끌고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해버렸고, [[옌후이칭]] 내각을 사퇴시키고 [[황푸]] 섭정내각을 출범시킨 후 대총통 [[차오쿤]]을 사로잡아 그에게 우페이푸의 파면 명령을 강요했다. 차오쿤이 어쩔 수 없이 우페이푸를 청해성 독판으로 전출시키고 정전령을 하달하자 우페이푸는 정전령이 펑위샹의 강요로 나온 불법명령이니 따르지 않겠다고 저항하다 패해 패잔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펑위샹은 차오쿤을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으나 장쭤린이 차오쿤 사퇴를 요구함에 따라 차오쿤을 물러나게 했고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실을 [[자금성]]에서 축출했다.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장쭤린은 즉각 뒤통수를 날리는데, 펑위샹 휘하 2개 여단을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은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펑위샹의 부하들은 장쭤린을 암살하자고 제안하지만, 펑위샹은 그랬다간 남은 [[봉천군벌]]들이 분노하여 공격해올 것인데 펑위샹의 세력으론 봉천군을 이겨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펑위샹은 한달만에 베이징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924년 11월 24일, 여러 군벌들의 추대로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임시 집정에 취임했다. 펑위샹은 직봉전쟁의 전리품으로 척박한 샨시와 쑤이위안만을 차지했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장쭤린을 친일분자라고 싫어했던 펑위샹은 장쭤린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다. 펑위샹은 1925년 11월 [[궈쑹링]]이 [[반봉사건|장쭤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고 그 패잔병들을 흡수하며 권토중래를 노렸고 [[돤치루이]]의 측근 [[쉬수정]]을 납치하여 암살했다.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펑위샹의 확장에 불쾌해하며 옛날의 적인 우페이푸와 손을 잡았고 산시의 [[옌시산]]도 끌어들여 삼각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1926년 5월 펑위샹이 옌시산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직봉풍전쟁]]이 발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