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더화이 (문단 편집) === 실각 및 숙청 === 중국에 돌아와 [[6.25 전쟁]]을 원점으로 돌린 공로로 국방부장 겸 부총리를 맡았다. 펑더화이는 자신이 국방부장 시절이던 [[1955년]]에 군에 계급제를 도입하였고 자신은 군 서열 2위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 군 서열 1위인 [[주더]]가 당시 70살이었고, 건국 이후 나이 문제로 사실상 퇴역 상태였기에 펑더화이가 현역 중에서는 군 내 최고 서열이었다. 주더는 선천적으로 몸이 강골이었던지라 문화대혁명 이후까지 살아남아 국가원수 대행도 하고 90살까지 살았다. 계급 폐지는 '노동자 인민이 스스로 나서서 하는 혁명무력과 평등한 군대'를 꿈꾸던 소련도 시도했던 일이다.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세비키는 계급을 폐지했지만, [[적백내전]]이 시작되자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전쟁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면서 러시아제국 군인들을 대거 영입하고 이 군인들의 지휘권을 보장해주었다. 1935년 스탈린 시대에는 아예 계급을 부활시켰다. 다만 이 군인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 없었기에 [[정치장교]]를 한 명씩 붙였다. 펑더화이는 소련군과 미군을 모범으로 삼고 인민해방군을 전문성이 낮은 의용병에서 전문성이 강화된 기술군으로 탈바꿈하게 하려고 계급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병사 개개인의 당성을 강조하던 마오쩌둥의 노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후에 숙청의 빌미가 된다. 1956년에는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 8차 당대회에 참관하기 위해 방중 중이었던 소련 대표단장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함께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질책하며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를 소집할 것을 강요하여 김일성이 숙청한 인물들을 복권하도록 지시했지만 김일성은 펑더화이와 미코얀이 귀국하자마자 이들을 다시 숙청했다. [[1959년 루산회의]] 직전의 중국의 상황은 마오쩌둥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신문과 라디오에서 초과생산 뉴스가 잇따라 나왔던것과는 반대로 질낮은 불량품이 넘쳐나고 일부 지역에서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며 부종환자들이 속출하는 등 파국으로 나타나는 징후가 본격적으로 드러났을때였다. 펑더화이가 [[1959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린 루산회의에서 한 발언은 펑더화이 자신을 비극처럼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 루산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성의 농촌을 시찰한 펑더화이는 선전과는 정반대로 곡물수확량이 급속히 감소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이 곤경에 처하는 현실을 직접 살펴보며 루산회의 기간에 마오쩌둥에게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전하면서 노선 전환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충언역이|그 편지는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정중한 태도로 작성되었지만]], 마오쩌둥 노선에 관한 비판이었으니 지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편지를 회의석상에서 공개하여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펑더화이가 당의 지도에 도전한다면서 비판하였다. 심지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8월 백단대전에서 마오의 지시를 어기고 일본군을 상대로 허락없이 승리했던 옛날 일까지 끄집어내어 펑더화이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몰염치한 행동에 펑더화이도 회의석상에서 반박했지만,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결국 해임되었고 후임 국방부장으로 [[린뱌오]]가 임명되면서 후일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다. 마오쩌둥 본인도 계획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끝내 수정을 미뤘고, 펑더화이가 숙청되는 걸 본 [[저우언라이]]나 [[덩샤오핑]]같은 타 지도부급 인사들은 몸보신에 급급하면서 마오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을 못하고 [[대약진운동]]이 2년 정도 연장되고 말았으며 결국 아사자가 중국 전역에서 속출해버렸다. 결국 펑더화이 개인이나 중국 인민들에게나 커다란 비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파일:펑더화이 숙청.jpg]] 결국 중국공산당 8기 8중전회에서 반당분자로 몰려서 비록 동지 경칭은 받았으되 정치국 위원 직무가 정지당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및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어 [[린뱌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파일:external/scontent.cdninstagram.com/12534667_1722192214658817_1675200654_n.jpg|width=300]] [[파일:external/www.jiaxiangwang.com/ld-pengdehuai-1966-pidou.jpg|width=300]] [[파일:external/history.people.com.cn/F201205031459122336300240.jpg|width=300]]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는 펑더화이. 그에게는 생애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1965년, 베이징 부시장이자 [[명나라|명]] 시대의 전문가인 우한이 쓴 [[해서|해서파관]]에서 해서가 펑더화이고 가정제가 마오쩌둥이라는 [[장칭]]과 [[야오원위안]]의 억지주장으로 [[해서파관 사건]]이 일어났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에서 퇴출당했고, 마오쩌둥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의 공격 대상이 되어 박해당했다. 1966년 12월 27일에 [[장칭]]이 파견한 홍위병들이 쓰촨의 펑더화이의 자택으로 몰려들었다. 홍위병은 칠순에 가까운 늙은 펑더화이를 모질게 고문하였고, 그 결과 그는 늑골이 부러지고 얼굴이 완전히 짓이겨졌으며 폐가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홍위병들은 만신창이가 된 펑더화이를 끌고 다니면서 조리돌림했고 펑더화이는 거의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앓았다. [[베이징]]의 감옥에 끌려간 펑더화이는 "마지막으로 경례를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마오쩌둥에게 최후의 편지를 썼고 병세가 악화되어 1973년 감옥 의무실로 이송되었다가 1974년 11월 29일에 암으로 사망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지 [[1991년|17년 후]] 같은 날에는 그와 함께 [[6.25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을 이끌었던 [[쑹스룬]]도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때 펑더화이뿐만 아니라 [[허룽]]도 조리돌림을 겪었는데, 군의 원로가 이렇게 참혹하게 박해받는 것을 본 인민해방군은 크게 격앙되어[* 차마 마오쩌둥에게 대놓고 항의하진 못하고 [[장칭]]을 비롯한 [[4인방]]에게 죽여버리겠다고 욕을 퍼부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4인방 중 1명은 마오쩌둥의 부인이다.] 난징 군구에서 펑더화이를 구출하겠다고 특공대를 파견하기도 하였고[* 마오쩌둥이 난징 군구에게 군정을 허용하면서 달랜 덕에 특공대는 철수하였다.] 마오쩌둥은 군부에게 과격한 홍위병들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여 군부를 달래야 했다. 이에 군부는 각 지방당부와 관청을 점령하고 패싸움하던 홍위병들을 총칼로 짓밟아 어느 정도 화풀이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군부가 정재계를 거의 장악하는 등 군부의 편중이 심해지자 홍위병을 다시 편들어 군부를 숙청하였다. >“당원과 민중들이 모두 펑더화이 동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당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했으며 혁명사업에 일관되게 충성하였다. 작전에는 용감했으며 어떤 곤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스스로 엄격하게 기율을 지켰다. 개인의 득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무거운 책임을 거리낌없이 맡았다.” >---- >중국공산당이 1974년에 사망한 펑더화이(팽덕회)에게 덧씌워진 누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1978년에 거행한 추도회에서 덩샤오핑(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출처: 펑더화이의 [[자서전]]인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169590311|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펑더화이 사건이 재조사되어 사면되었고 1978년 12월 24일 추도회가 열려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고 1981년 6월 27일 11기 6중전회는 펑더화이, 황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를 반당 집단으로 결의한 8기 8중전회의 결의를 오류로 평가하면서 펑더화이를 완전히 복권시켰다. [[시진핑]] 현 주석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 習仲勳, [[1913년|1913]]~[[2002년|2002]]. 국가부주석까지 지낸 혁명 원로 중 한 명이다.]은 제2방면군 시절부터 펑더화이의 [[정치장교]]였는데, 당시 펑더화이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가문이 몰락하였고 시진핑도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소련군]]은 인적, 물적 자원을 상당수 [[러시아 제국군]]으로부터 계승해 초기에 공산당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인사들이 좀 있어서 그들을 견제, 감시할 존재로서의 정치장교가 필수적이었다. 반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부군]]을 때려치우고 [[홍군]]으로 넘어올 때부터 아예 사상적으로 전향했거나, 홍군에서 군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정치장교라고 해봤자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사기 및 사상 교육 담당 참모에 불과했다. [[마오쩌둥]]도 명목상 [[주더]]의 정치장교였는데도 실제로는 홍군의 총사령관이었고 명목상 총사령관인 주더가 오히려 마오쩌둥의 참모장 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