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더화이 (문단 편집) === [[6.25 전쟁]] === >"눈이 검다니… 이것이 [[현대전]]인가?" >---- >― 펑더화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도강 직후 포연으로 새까맣게 변한 설원을 보고[* Heixue Chubing Chaoxian Jishi "Black Snow: The Actual Record of the Decision to Send Troops to Korea". Beijing, 1989.]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펑더화이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 유엔군이 개입하여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당시 자국을 이(齒), 조선, 즉 [[한반도]]를 입술(脣)에 비유하면서 한반도를 중국의 국가안보정책상 최고 요충지로 선언한 셈이다.]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 출병을 결정하고 펑더화이를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1950년 10월, 부사령관 [[쑹스룬]]과 함께 북한에 파견했다. 원래 마오쩌둥이 사령관으로 고려했던 인물은 국공내전 당시 화둥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부사령관 등을 맡았고 6.25 전쟁 시점에서는 대만 침공을 위해 한창 준비 중이던 쑤위(粟裕)였다. 하지만 1950년 7월 평소 [[고혈압]]에 [[위장병]], [[메니에르병]]까지 앓던 쑤위가 쓰러져 치료를 위해 소련으로 가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린뱌오]]가 임명되었으나 린뱌오는 한반도 출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린뱌오 역시 쑤위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많이 안 좋아 칩거 중이었다. [[주더]]는 야전사령관을 맡기에는 나이가 있어서 패스, 천이는 친우이자 최고의 파트너인 쑤위가 쓰러진 바람에 역시 패스, [[쉬샹첸]]도 몸이 안 좋아서 요양을 위해 칩거 중, [[류보청]]은 육군대학 설립에 열중하고 있어서 임명 불가, 천겅은 이미 [[베트남]]에 파견되어 [[호치민]]을 돕고 있었다. 따라서 사정이 되면서 한반도 출병에 찬성했던 펑더화이가 맡게 된 것이다. 알고 보면, 평소에 한반도의 정세에 많이 관심 있던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의 한반도 출병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전황을 비관하던 지도부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도 크게 작용했다. 어떤 [[반공]]주의 한국 작가의 괴서적 《모택동과 임표》에는 린뱌오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괴설을 싣고 있으나 린뱌오는 [[6.25 전쟁]] 개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 대신 대만 침공이 물건너가 중화민국 멸망에 실패하고 어쩡쩡한 양안관계가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지만, 당시 펑더화이도 6.25 전쟁 참전이 2년 넘게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 테니 할 말은 있을 듯. 파병된 부대는 모두 인민해방군 부대였으나 중국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직접으로 맞붙는다는 인상을 피하려고 이 부대들을 굳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고 명명하였다. 즉, '''"이 군대는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핍박받는 조선 인민들을 가엾게 여겨 스스로 참전한 것임. 그러므로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 없음"'''이라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민지원군이 참가하자마자 유엔군은 이들이 중국 정부에서 보낸 것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참전한 공군도 자기네들은 인민해방군 공군과 관계 없다며 기수에 "중국 인민지원군"이라고 한자로 써 붙이고 나왔는데 그럼 '''자기 돈으로 전투기 사서 출전했다'''는 소리니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1051609474240004300-001.jpg|width=100%]]}}}|| || '''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오른쪽). 혈맹국 전쟁 수뇌부인데도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나빴다. ||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한반도로 건너 온 펑더화이는 김일성 탓에 많이 고생하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총사령관을 맡기 전부터 김일성의 오판으로 벌어진 [[6.25 전쟁]]의 무모한 앞뒤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북한에 도착해서는 멀쩡한 군단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주제에[* 1951년 당시 북한은 기나긴 공방전에 전황마저 불리한데 인민 정규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징집할 2~30대 남성도 부족하자 연변의 조선족을 상대로 모병활동을 벌이고 심지어 고등학생은 물론 그보다 어린 중학생들까지 의용군이란 명목하에 전쟁터로 끌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군을 [[고기방패]] 취급하면서 막무가내로 진군하라고 우기는 김일성의 무능에 학을 뗐다. 중국군이 밀어붙이면 미군이 알아서 철수할 거라고 빽빽 우기는 햇병아리 김일성을 상대로 일본군, 국민당군과 숱한 전투를 치르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펑더화이가 크게 언쟁하면서 주먹다짐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썰도 있다.[[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12/2014051202282.html|#]] 이 때 펑더화이는 김일성을 향하여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11일 황혼 무렵에 다시 열린 펑더화이·김일성·박헌영의 3자 회동은 초반부터 분위기가 냉랭했다. 박헌영은 특히 소련 측이 제공한 정보를 들어 “미군이 곧 철수할 것”이라며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추격을 하지 않으면 미군이 철수 계획을 철회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다. 미군에게 한반도에서 철군할 핑계거리라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급히 추격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미군이 철군할 요량이라면 우리가 추격하지 않아도 물러날 것”이라며 전날과 같은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다. 박헌영은 남로당 총책답게 공산주의자의 논리로 맞섰다고 한다. 그는 “추격을 펼쳐야 미국의 자산계급 내부의 모순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펑은 “미군 몇 개 사단이라도 없애고 나서야 그런 미국의 모순을 심화할 수 있는 법”이라며 단순하게 땅을 확보하는 전략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맞섰다. 아울러 펑은 “지금은 우리 군대가 휴식과 보충을 취해야만 전장에 나설 수 있다”며 다시 선을 긋고 나섰다. >그러자 김일성이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장에 3개 군(軍)을 진격시켜야 한다. 다른 부대는 한 달 정도 쉬게 한 다음 공격에 나서도록 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면서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졌다는 것이다.(중략) >“당신들의 관점은 틀렸다. 모두 기대와 바람에서 출발하고 있다. 당신들은 예전에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최소한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쩔 것이냐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미군이 반드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역시 미군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에는 어쩔 것이냐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전쟁에서 빨리 승리를 거두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아 결국 전쟁을 연장시켜 놓지 않았느냐. 당신들은 전쟁을 요행(僥倖)으로만 보고 있다. 국민들을 가지고 도박을 벌이는 일과 같은데, 이러면 앞으로의 전쟁을 또 실패로 몰고 갈 공산이 크다. 우리 군대는 앞으로 두 달을 휴식하며 보충할 예정이다. 하루도 줄일 수 없다. 그 기간이 3개월에 이를지도 모른다. 상당한 수준의 준비가 없으면 우리는 1개 사단도 남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단코 적을 우습게 보는(輕敵) 당신들의 착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 펑더화이가 직무에 충실치 않는다고 하면 심판해라, 그리고 나를 죽여라!”(후략) >---- >선즈화(沈志 華) 교수의 저서[* 출처는 다음과 같다. "'''천젠, 선즈화, 밀턴 라이텐버그, 캐스린 웨더스비 공저, ARGO 연구소 번역, <한국전쟁의 거짓말 :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의 불편한 동맹>, 2018, p.122~124."'''] 펑더화이가 김일성과 갈등한 다른 일화로, 1951년 5월에 춘천 북배산 일대에서 미 제24사단, 미 제7사단, 한국군 제6사단에게 삼각으로 포위당한 중국군 제180사단 총 7,000명이 패잔병 1,000명만 남기고 풍비박산, 대참패한 일이 있다.[[http://koreanwar60.tistory.com/771|#]] 이때 중국군 제180사단의 측면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유사시 퇴로를 확보해야 할 북한군 제1군단은 중국군 측에 통보하지도 않고 퇴각해버렸고, 이 일로 병력을 어이없이 잃은 펑더화이가 크게 화냈다고 한다. 광둥성 자오칭도시보, 홍콩 명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일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두 대 쳤고 얼굴이 퉁퉁 부은 김일성은 일주일간 숟가락을 못 들었다고도 전한다.[[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08/2014070802617.html|#]] 출병 후 펑더화이는 [[미군]]이 화력과 물량 면에 강점이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고 야간 전투에 취약하며 공중 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약점'''을 통찰하였다. 이것은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가 자신의 저서 《The Korean War》에서 "이놈들은 차만 타고 다니려고 하지 자기 발로 걸어 이동하는 것을 도저히 모른다. 이런 꼴을 선배님들이 보신다면 땅속에서 목 놓아 우시겠다"면서 비판한 내용과 일치한다. 보병의 강점 중 하나는 어지간한 험지에도 문제 없이 배치,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군하지 않고 차량에만 의존하는 보병은 이 강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지형이 평탄한 곳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는 차량은 갈 수 없어도 보병은 갈 수 있는 곳이 꽤 된다. 이것을 이용하여 펑더화이는 산악지대에 대군을 매복했다가 깊숙이 들어온 미군과 한국군을 시계가 제한되어 포격과 폭격 지원이 용이치 않은 저녁과 새벽 사이 포위하듯 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한국에는 [[인해전술]]로 알려져 있지만, 엄연한 포위 작전(구대전법)이었고 중국군이 단순히 병력으로만 밀어붙인 건 절대로 아니었다. 돌려 말하자면, 해당 전역에 투입한 인원 자체는 중공군이 UN군에 대해 결코 압도적으로 많은 적이 없지만, 개별 전투에서는 기동이던 매복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양한 방법으로 최대한 수적 우세를 확보한 후에야 돌입해서 UN군 입장에서는 인해전술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웃픈 점은 그런 식으로 부대를 유연하게 운용해서 우세를 달성하라고 있는 것이 미군이 사랑하고 넘치게 갖고 있는 차량인데 이걸 한반도에선 활용할 상황이 당시엔 제대로 못되었다는 점이다. 양측이 서로의 전술적 강점을 꺼리는 가운데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2년여간 계속 [[군사분계선|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 중심의 교착된 상태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에 있던 펑더화이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을 담당하던 마오쩌둥의 큰 아들 [[마오안잉]]이 1950년 [[11월 25일]]에 미 공군 F-80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전사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의 전사를 베이징에 바로 보고했으나 중간에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여 '''마오안잉이 죽은 지 3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보고했다.''' 게다가 먼저 보고한 게 아니라 마오쩌둥이 아들의 안부를 물어보자 실토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다가 "전쟁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한 뒤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주석이 본을 보여야 한다며 장남 마오안잉을 참전하게 하되, 펑더화이와 주변 몇몇 사람 외엔 이 사실을 극비리에 붙였다. 게다가 사령부는 공습에 대비, 동굴과 같은 구조였는데 네이팜의 화염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야사에 따르면 사령부가 불타는 와중에 펑더화이가 직접 마오안잉을 구하려 하였으나 그 안에 있던 장교가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다른 장교들이 뜯어말렸다고 한다. 이후 전사 보고를 접한 마오쩌둥은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라고 쿨하게 넘기는 듯했지만 훗날 [[문화대혁명]] 시기에 펑더화이를 극렬히 조진 것을 보면 이 일로 앙금이 생겼을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 펑더화이는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1953년]] [[7월 27일]], 지난했던 [[6.25 전쟁]] 휴전협정 조인식에 중국 대표 중 한 명으로서 참석하여 휴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전쟁을 끝낸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1813.img.pp.sohu.com.cn/11ceaadd4beg215.jpg|width=100%]]}}}|| || [[리즈시절]]의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