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더린 (문단 편집) === [[장훈복벽]]과 몰락 === 그러다가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죽었다. 이에 펑더린은 봉천으로 와서 장쭤린에게 3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 1. 방판 권력과 장군 권력이 완전 평등해야 한다. * 2. 사람을 쓸 데는 서로 자문을 구한다. * 3. 20만원으로 28사단에 비행기를 사준다. 펑더린의 요구가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장쭤린 입장에서는 들어줄 수가 없었지만 장쭤린의 후견인인 위안스카이가 죽은 걸 안 펑더린은 더욱 안하무인으로 나왔다. 그리고 [[돤치루이]] 신내각이 출범하자 28사단 장병 전체의 이름으로 돤치루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등 중앙에 공공연하게 도전했다. 돤치루이는 전 동삼성 총독 조이손을 보내 해결하게 했지만 조이손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펑더린은 1917년 3월, 장쭤린의 부하인 53여단장 [[탕위린]]과 결탁하여 장쭤린을 제거하려 했지만 장쭤린은 돤치루이의 지원사격을 받아 탕위린을 파면하고 [[장징후이]]로 대체하였다. 이쯤에서 돤치루이의 분노가 폭발하여 2개 사단을 보내 펑더린을 토벌하고자 했다. 이에 놀란 펑더린은 북진의 주둔지에 처박혀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1일, [[부원지쟁]] 끝에 장강순열사 [[장쉰]]이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장훈복벽]]을 단행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장쉰은 펑더린을 자신의 사람으로 회유하려 했는데 펑더린은 장쉰을 도우면 자신이 봉천독군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 200명의 장병을 베이징에 보낸 후 자신도 6월 20일 호위병 30명을 거느리고 입경하여 장쉰의 복벽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선포하였으며 28사단 소속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켜 황실을 지키겠다고 했다. 펑더린의 알현을 받은 선통제는 펑더린을 어전시위대신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복벽은 돤치루이가 국무총리 겸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금방 불리하게 돌아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안 펑더린은 7월 10일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달아났으나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이 입성하여 7월 15일 펑더린 체포령을 내림에 따라 톈진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8월 15일, 돤치루이는 펑더린이 공화국을 배반한 죄가 크다고 28사단장직과 육군 중장 계급을 박탈하고 투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