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더린 (문단 편집) === 장쭤린과의 갈등 === 그러던 중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했고 1912년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9월 11일 위안스카이는 순방영 전로통영 겸 중로통영인 [[장쭤린]]에게 지시하여 동삼성의 군대를 개혁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장쭤린은 육군 제27사단에 취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고 펑더린은 28사단장 겸 육군 중장이 되었다. 펑더린은 표면적으로는 장쭤린과 잘 지냈으나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병사도 많은 장쭤린을 시기하여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는 일이 생겼다. 장쭤린 등은 표면적으로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옹호하였지만 실제로는 만주에서 중앙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도모하고 있었다. 이들은 봉천장군 장석란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곧 위안스카이의 심복 [[돤즈구이]]가 봉천장군으로 취임하면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반대하여 [[호국전쟁]]이 벌어지자 장쭤린과 펑더린은 이 틈을 타서 돤즈구이를 몰아내기로 했다. 펑더린의 28사단이 돤즈구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 하고 장쭤린의 27사단이 돤즈구이를 옹호하는 척 하다가 만주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사실은 펑더린에게 약역을 강요하려는 장쭤린의 술수였다. 이 계획은 주효하여 돤즈구이는 만주에서 쫓겨난 후에 위안스카이에게 펑더린에 대해서만 보고하고 장쭤린은 오히려 호의적으로 보고했다. 두 사람의 합작은 어디까지나 돤즈구이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일시적으로 맺어진 것이라서 오래 갈 리가 없었다. 1916년 4월 22일, 위안스카이가 장쭤린을 봉천장군 겸 봉천 순안사로 임명하고 펑더린을 봉천 군무방판으로 임명했는데 펑더린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장쭤린이 자신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 때문에 크게 분노하여 군무 방판 취임을 거부했다. 장쭤린은 펑더린이 가진 1개 사단 병력을 의식하여 그에게 아첨하며 그를 선배로 예우했고 기분이 좋아진 펑더린은 군무 방판 부대를 독립부대로 운용하여 봉천장군부와 별개로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제의했다. 장쭤린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15만원의 판공비를 매달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펑더린은 거절했다. 이에 장쭤린은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위안스카이는 전 봉천장군 장석란을 보내 중재를 시도했으나 펑더린은 장석란의 중재를 묵살했다. 장쭤린은 54여단장 손열신을 보내 많은 선물과 3만원의 [[금일봉]]을 내리며 펑더린에게 방판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1916년 5월 20일, 봉천성에 입성한 펑더린은 28사단 사령부를 설치했다. 장쭤린은 펑더린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를 베풀었으나 펑더린은 참석조차 하지 않았고 이에 장쭤린이 펑더린을 직접 찾아가 기생 파티를 열어주었으나 펑더린은 장쭤린에게 50만원을 인출하여 비행기를 사달라고 요청했고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쳐 7개 부대를 증설, 북진에 독립 부대를 설치하자고 요구한 후 바로 다음날 북진으로 돌아가버렸다. 장쭤린은 비서장 [[양위팅]]을 보내 펑더린을 계속 달랬으나 펑더린은 요지부동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