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궈장 (문단 편집) === 초기이력 === 1859년 1월 7일 직예성 하간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 중 두명이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어 오랫동안 자신도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1881년 과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당숙 풍감당의 도움으로 바오딩의 연지서원을 2년 다녔으나 때려치고 1884년 회군 직자영에 입대했다가 1885년 [[천진무비학당]]에 들어갔다. 이때 1888년, 동시에 합격하여 1등으로 수재가 되었는데 신나서 학당을 때려치우고 1889년 순천 향시에 응모했지만 낙방하여 다시 학당으로 돌아왔다. 1889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하고 임관 후 학당의 교습으로 남았으며 1893년, 회군장령 섭사성의 군대 막료가 되어 그의 신임을 받았다. 1894년, 섭사성 휘하에서 [[청일전쟁]]에 참여했으며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청일전쟁 종전 후 섭사성의 추천으로 주일 청국 공사관 유경의 수행원에 임명되어 일본에서 잠시 근무하였으며 이때 후쿠시마 야스마사, 아오키 노부주메 등 일본군부의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후 1896년 귀국했다. 귀국 후 펑궈장은 여러 병서를 편찬하여 이를 [[위안스카이]]에게 보고했는데 소참에서 신건육군을 건설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이를 매우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96년 신건육군에 들어가 신군연병을 거들게 되었고 곧 이어 독조영무처(督操營務處) 방판(帮辦) 겸 보병학당 감독이 되어 [[위안스카이]]의 측근이 되었고 [[돤치루이]], [[왕스전]]과 함께 북양삼걸 중 한 사람으로 불렸다.[* 다만 북양의 개라는 다소 뭣한 별명이었다. 펑궈장이 재물욕이 많고 탐욕스러운 것이 한몫했을 듯.] 이후 독조영무처 총판으로 승진했으며 왕스전, 돤치루이와 함께 <훈련조법상석도설> 22책을 편찬하여 수영학당의 표준교재로 채택되었다. [[무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의 총애를 받게 되자 위안스카이를 수행하여 [[의화단 운동]] 기간 동안 산동성의 의화단을 진압했고 산동용영 1만명을 무위우군 선봉대로 개편하여 직예와 산동 접경 지대의 덕주의 의화단을 토벌했다. 1900년, 의화단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부용지부로 승진했으며 산동성 제남에서 산동군 독조사업을 주관했다. 1901년 북양군정사교총판총판(總辦) 겸 영보병학당(營步兵學堂) 감독(監督)을 지냈으며, 다시 일본에 파견되어 철량, 봉산 등 만주족 귀족들의 일본 시찰을 보좌했다. 귀국 후 연병처 시정사에 임명되어 북양무비학당을 관리했으며 북양속성무비학당 총판 겸 장변학당 총판을 지냈다. 1903년에 위안스카이의 건의로 연병처가 설치되자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총리연병대신에, 위안스카이가 연병처회판대신에 임명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쉬스창]], [[돤치루이]], 유영경, 육건장, 왕사진 등의 심복들을 연병처의 요직에 임명했는데 펑궈장은 북경연병처군학사정사(北京練兵處軍學司正使)로 임명되었다. 1906년에 황기몽고부도통(黃旗蒙古副都統) 겸 육군귀주학당(陸軍貴冑學堂) 총판(總辦) 등의 직책을 지냈고 2등 남작에 봉해졌다. 이 경력으로 청나라 황족들의 신뢰를 맏게 되었으며 1907년 육군부 군자처정사로 승진, 1908년 청서릉양각장치반대신에 임명되었다. 1908년, [[선통제]]가 즉위하고 [[순친왕]] 재풍이 권력을 잡아 위안스카이가 권좌에서 축출된 이후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장쉰]], [[차오쿤]], 뇌진춘, 장사옥, [[돤즈구이]], 강계제, 육건장, [[돤치루이]] 등과 함께 하남성으로 낙향한 위안스카이를 연일 문안하며 북양군이 계속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할 것을 다짐했다. 이후 군자사 겸 2군의 사령관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