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팡테옹 (문단 편집) == 건축적 특징 == 파리의 국립묘지라는 상징성 이외에도, 건축학적으로 봤을 때 팡테온은 상당히 흥미로운 건물이다. 한 건축가가 각기 다른 양식의 건축을 통합하고자 했던 야심작이었지만, 그가 죽은 뒤 그 의도가 상당 부분 퇴색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축은 1757년에 시작되어 90년에 완성되었다. 팡테온은 원래 생 주느비에브(Sainte-Geneviève; 성녀 제노베파) [[성당]]으로 건축된 것이다. 병으로 다 죽어가던 [[루이 15세]]가 제노베파에게 쾌유를 기도했고, 병에서 회복되자 당시 파리에서 제일가는 성당을 짓기로 결정한다. 건축가는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인물인 자크 제르맹 수플로(Jacques-Germain Soufflot)가 임명되었다. 수플로는 1755년부터 성당을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대담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생 주느비에브 교회는 고딕 건축의 밝음과 그리스 건축의 순수함을 조합할 것이다. >---- >자크 제르맹 수플로의 조수였던 롱들레가 전한 수플로의 말. 생 주느비에브 성당을 짓기 이전에 [[로마]]에서 [[판테온]] 등을 공부했던 수플로는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 지나치게 화려한 [[로코코]] 양식에서보다 순수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건축에서 이상향을 찾았다. 이러한 것을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플로는 천대받던 [[고딕]] 건축의 구조와 커다란 창에 주목을 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신고전주의와는 달랐다. 이러한 것은 이 건물과 유사한 절충형 건축물인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생 주느비에브 성당은 구조는 공중부벽(플라잉 버트레스) 등을 사용한 고딕적인 구조지만, 그것을 가벽으로 가려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경우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은 고딕을 혐오하면서 고딕식 성당을 공사 도중 바로크 식으로 개축한 것에 가깝지만, 수플로는 처음부터 고딕과 그리스풍 고전 양식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 [[파일:external/www.trekexchange.com/Le_Pantheon_de_Paris.jpg|width=100%]] || || 내부 구조 || 수플로는 구조적으로 육중한 벽으로 돔을 지탱했던 고전 양식의 구조를 버리고, 얇은 기둥들이 서로 연계되어 지탱되는 고딕식 구조를 추구했다. 이를 통해 성당 기둥들은 더욱 얇아지고, 가볍게 보일 수 있다. 외벽를 둘러싼 48개의 큰 창들을 내서 건물 안을 밝게 비출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평면은 고딕식의 긴 라틴 십자가가 아닌 그리스 십자가형의 중앙집중식 평면을 선택했고, 중앙에 [[돔]]을 건설하고, 세부적인 장식 역시 고전 양식으로 덧씌우려고 했다. 팡테옹, [[세인트 폴 대성당]], 이 두 건물 모두 [[도나토 브라만테]]의 템피에토의 외형과 유사한 돔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 팡테옹의 돔은 설계되면서 구조도 세인트 폴 대성당의 삼중 돔 구조와 유사하게 발전되었다. 다만 수플로가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을 참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차이도 많다. [[앵발리드]]와 세인트 폴 모두 외부 돔은 목재로 프레임을 짠 것인데, 팡테옹은 전체가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크고 무거운 돔은 중앙부의 얇은 기둥들로 떠 받쳐지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며 보이지 않는 외벽 부분에 숨겨진 공중 부벽등이 옆에서 추가로 지탱하고 있다. 아무튼 많은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차츰 성당은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1780년에 수플로가 사망하게 된다. 수플로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아직 돔이 다 올라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1790년에 설계대로 완성된다. 그러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분위기는 이 건축물을 크게 변형시키게 된다. 1791년에 원 설계자인 수플로가 없는 상태에서 이 건축물은 왕의 성당에서 위인들의 묘지로 그 용도가 바뀌게 된다. 이름도 팡테옹으로 바뀌게 되었고, 묘지와 밝은 건물이 안 어울린다고 판단되어 건물을 둘러싼 48개의 창을 벽돌로 막아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당 외벽의 창 장식들은 다 사라지고, 외관의 종교적인 조각들 역시 전부 폐기되었다. 심지어는 1790년대 말에 돔을 제거하거나 피라미드 형태로 개장하는 재설계안도 나왔었지만, 다행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성당 근처에 세워졌던 종탑도 이 때 철거되었다. 몇 년 뒤에는 더 안좋은 사실이 밝혀진다. 돔 아래 중앙부를 둘러싼 기둥들에서 균열이 발견됨에 따라 이 성당의 구조가 돔을 지탱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된 것이다. 결국 1806년에 돔 아래의 아치 부분을 받치는 기둥을 버팀벽으로 교체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구조물은 원형보다 육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때 건물의 장식과 조각들은 새로 설치되었다. 이러한 변화들 때문에 이 건물은 수플로가 목표로 했던 밝고 가볍게 보이는 느낌의 건축물에서 크게 후퇴하게 된다. 결국, 수플로의 이상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테온은 훌륭한 건물이며, 파리의 대표적인 18세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이 건물의 정면은 [[판테온]]에서 따왔다. 정면에서 입구를 바라보면, 로마의 판테온과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보면, 1층은 전시실로, 이곳에 잠든 여러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예배당 등이 있다. 무덤인 만큼 내부는 어두운 곳도 있다. 으스스하기보다는 마치 박물관이나 기념관 같은 분위기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지어진 건물인 만큼, 석조건물의 느낌이 색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국립묘지]]라고 해서 한국의 [[현충원]],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이 풀밭에 비석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장엄한 건물 안에 여러 위인들과 명사들의 석관들이 방별로 배치된 형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