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로군 (문단 편집) == 상세 ==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으로 [[중국]]의 군벌을 타도하던 중인 1927년,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4.12 상하이 쿠데타]](4.12사태)가 이루어졌는데, 이 공격으로 중국 내 공산당이 큰 타격을 입었고 [[마일사변]], 코민테른의 6월 지시 등이 겹치면서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가 [[국공결렬]]을 결정, [[1차 국공합작]]의 종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군대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상기 언급한 상하이 쿠테타로 인한 경험은 마오쩌둥에게 독자적인 공산당 군대를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1937년에 약 3만명의 인원으로 결성되었으며, 급속도로 숫자가 늘어 1945년에는 60~98만 정도의 숫자로 증가하였다. 팔로군이라는 명칭은 당시 중국대륙의 '정통정부'인 국민당 정부로부터 '공산당의 군대'가 정식으로 인정받아 공비라는 멸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첫 이름이며 팔로군 시기 일본을 상대로 어느정도 선전을 거두었다. 따라서 홍군 내부와 민중들에게 그 평판이 좋았기에 홍군은 팔로군이라는 이름을 꾸준히 쓴 것이다. 팔로군은 소련군이 [[일본]]에게서 탈취한 장비를 인계받아 사용하였으며, 급격히 숫자가 늘어난 후기에는 정규전을 벌일 정도의 전력으로 증강되었다. 1927년 2월, [[김좌진]] 장군이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 위원장을 겸하고 있을 당시, 녹림 출신의 중국 구국군 13군 사령관 양우일(楊宇一)이 휘하의 참모 손림(孫林)을 특파하여 김 장군을 초청하였다. 평소 휘하 병사들에게 [[한국인]]으로부터의 금품 갈취를 금지시켜온 양 사령관의 인품을 높이 사 오던 김좌진 장군은 이 초청을 받아들이는데,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가 중국군과 독립군의 연합이었다. 하지만, 이를 파악한 [[장작림]]에 의해 체포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장작림]]으로서는 국민당의 중앙정부가 그런 계획을 자기 영역에서 꾸미게 둘 수는 없었다. 이로써 독립군의 공식적인 팔로군 참가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독립군은 팔로군으로 참여하였으나, 독립전쟁에 활용되기 보다는 국공내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팔로군은 1937~1945년에 [[일본군]]과 싸운 [[중국 공산당]]의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로서 모택동이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군대이다. 물론 실상은 중국 공산당은 항일보다는 세력 확장과 국민당에 대한 팀킬을 일삼았다.전후에는 [[만주 작전]]을 막 마친 소련군이 제공한 50만명을 무장시키기 충분한 일본제 노획 무기들을 제공받고 국민당에 맞서기 충분한 장비까지도 갖추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공군 편에서 대한민국(남한)을 공격했던 세력 중에도 또한 이 팔로군 출신 부대들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