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스타인/역사 (문단 편집) === 제1차 인티파다 === [[파일:external/ancientworldstudies.pbworks.com/first_intifada.jpg]]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여 [[팔레스타인]] 건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것이 바로 인티파다(انتفاضة, Intifada)이다. 봉기, 반란, 각성을 의미하는 아랍어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을 기점으로 한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이 모임이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지역적으로도 가자지구에서 서안 지구로 확대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 마당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는 시몬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은 재미로 쏘아 죽였으며, 그 후 시몬은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의 인구의 60% 이상이 미성년자였던 상황이엇고 자연스레, 시위에 있어서 청소년층의 역할이 매우 컸던것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이들이었다. [[파일:external/libcom.org/intifada1%5B2%5D.jpg]] [[파일:external/nena-news.globalist.it/NEWS_48383.jpg]] [[파일:external/www.palestinalibre.org/43061201301040532pol43061.jpg]] 때문에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전차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 청소년과 어린이들'''로 형상화된다.[* 이는 팔레스타인이 돌이 굉장히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시위대가 돌을 가지고 와서 던지는것이다. 실제로도 팔레스타인의 수출품에서 건축용으로 사용되는 석재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여담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돌은 '''2000년 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로마군 포병이 투석기 포탄으로 잘 써먹은 바 있다.] 이 아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 전체를 이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투쟁의 과정 속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통합사령부를 부활시켰고, 이스라엘 제품 불매운동과 자급자족 캠페인을 진행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물가를 단속하였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1일동안의 통행금지 명령을 내린 다음에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군대를 투입해서 모조리 학살했다. 이스라엘 군이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세계에 노출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난여론을 불러왔다. 물론 인티파다가 일어났다해도 현실적인 개선은 없었다. 이 사건은 '''아랍세계의 독재자들을 긴장시키는 의외의 부작용이 나타나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던 요르단 등에서는 오히려 서안 지구 문제에 대해서 손을 떼기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여론은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강경진압해야된다는 여론이 강해져서 1988년 총선에서 이츠하크 샤미르가 이끌던 우익 리쿠드 당이 승리했고, 타 우익정당과 함께 연립정권을 구성하여 4년간 이어졌던 대연정이 끝났다. 그리고 안보여론을 등을 얻은 이스라엘 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하게 진압을 가했다. 기껏해야 돌과 화염병이 주무기였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투입하였고, 전차에 돌을 던지던 소년 시위대의 팔을 말그대로 부러뜨렸다. [[이츠하크 라빈]]이 '그놈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려라(Break their arms and legs)'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팔이 부러진 시위대만 수백명이었다. 1987년 시작된 인티파다는 오슬로 협정이 있었던 1993년까지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강경진압을 계속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이 부상당하고, 1,603여명이 죽었는데 이중 17세 미만이 273명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은 불시에 팔레스타인 남성들을 소집해서 폭행하거나 고문했으며, 가택수사 명목으로 집안에다 최루탄을 던져 팔레스타인인을 폭행하곤 했다. 이러다보니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고 막장 국가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있어 시민과 군인 277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친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 아랍인]]들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공격당해 359명이 살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