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스타인/역사 (문단 편집) === 후세인-맥마흔 서한과 영국의 3중 계약 ===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튀르키예]]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튀르키예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튀르키예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벅차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이자 [[하심 가문]] 아미르인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영국은 후세인 빈 알리에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후세인 빈 알리]]를 도왔다.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협정을 맺었지만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 빈 알리는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은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터키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터키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터키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중략) 영국의 제안은 당시 메카의 군주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애드워드 로렌스가 그를 도왔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15쪽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실망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은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5쪽 한국에선 맥마흔 선언 vs [[벨푸어 선언]]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후세인- 맥마흔 서한이 묵살된 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제1차 중동전쟁]]에서 [[트란스요르단]]의 목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인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이 비로 후세인 빈 알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트란스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은 국토를 확장해 요르단이라고 국명을 개명했다. 요르단은 구시가지가 있는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국토에 합병시켰다. (중략) '''요르단 국왕은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의 큰 꿈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메카의 수장이었던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에 협조해 거대한 아랍국가 건설이 그의 아들 대에 와서 실현되는 듯 했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90쪽. 하지만 동시에 당시 국제금융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로스차일드|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하는 유대계 금융권에 접근해서 전쟁자금 지원을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민족의 독립'''을 약속하는데 이것이 당시 영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딴 '''[[밸푸어 선언]]'''이다.[* 이 밸푸어 선언은 [[파리 강화 회의]](1919)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는데 이는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 영토 분할, 전후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 를 안건으로 모였던 회의였다.] 영국은 통일 아랍국가 건설과 독자적 유대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두가지 상충되는 약속을 하였고 이것이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뿌리깊은 중동 분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양 민족의 독립을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다음'으로 미룬 뒤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점령하는 내용의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체결한다. '''영국은 하나의 땅을 가지고 3중 매매'''를 한 셈이다. 자세한건 [[벨푸어 선언#s-1.5]] 문서의 1.5문단 "문제"를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