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기군 (문단 편집) === 쇠퇴 === [[파일:묘족 반란군을 격퇴하는 팔기군.jpg]] [[준가르]] 원정이나, 18세기 말 [[구르카]]들이 티베트의 라싸를 약탈했을 때 팔기군들이 구르카들을 추격해서 명목상의 항복을 받아낸 사례에서 보듯, 인구 밀도가 희박하고 원정 거리가 긴 지역에서는 팔기군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청나라가 명나라에 비해서 국토가 압도적으로 방대해진 이유 역시 팔기군의 기동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남방에서 벌어진 [[삼번의 난]] 때만 하더라도 팔기군은 초반 반란의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삼번의 중심지인 남방 열대우림 지대에서 팔기군 같은 기병이 온전히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었다. 청나라와 버마 사이의 전쟁에서는 약소국 버마를 상대로 압도적인 국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뷰신]]의 버마군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문제는 청나라 국부의 핵심이 중앙아시아 영토가 아니라 바로 [[장강]] 유역과 그 이남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19세기 청나라 영토의 노른자땅에서 차례차례 일어나는 여러 반란들 앞에서 팔기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팔기군은 형편없는 전투력에 유지비만 많이 들어가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팔기군은 만성(滿城)에 거주하며 기인(旗人)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에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려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기 이후, [[백련교도의 난]] 진압 당시에 만주 및 몽골 팔기군의 무능과 나태가 어찌나 극심했던지, 사천총독인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그 스스로도 [[만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몽팔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며 조정에 보고했다. >"[[만주족]]과 [[몽골인]] 군대는 [[당나라 군대|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며 나태하고,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 이미 옹정제 시기인 준가르 정벌 때부터 녹영이 청나라의 주력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건륭 연간에도 준가르 복속에 있어서 팔기와 녹영을 섞은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운용했다. 하지만 백련교도의 난, 그리고 태평천국 운동 시기엔 녹영마저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향신 계급이 만든 의병인 '''향용'''으로 대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폐지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 더 정확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예비군]]의 성격이 강해짐.]이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했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실질적으로 군사적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 백련교도 반란군과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해 지역에서 모집한 향용 자원병들을 서양의 군사교관이 훈련시켜 군대로 발족한 상승군이나 상첩군으로 진압해야만 했다. 또한, 팔기군은 태생적으로 [[기병]]이어야 하는데 군마의 부족이 심각해진 나머지(왜냐면 말을 관리하는데 소홀히하거나 향락에 빠진 나머지 빚을 많이 져서 군마를 팔아야 한터라 군마 부족이 심각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기몽고를 제외한 다른 팔기군은 보병 전력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청나라 초기, [[만주족]]이 기름지고 따뜻한 중원으로 이주한 것과 달리, 몽골족은 만주족 남성과 결혼한 몽골족 여성들을 제외하면 거의 척박하고 추운 오르도스나 후룬부이르 등 내몽골 초원지대에서만 살다시피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청나라 치하의 몽골족은 강력한 기병력을 만주족보다 더욱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몽골족도 만주족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전투력이 퇴보하면서 결국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허무하게 참패하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게 함정이다. 사실 애초에 몽골족도 청나라가 안정되자, 오랜 평화에 젖어 자꾸만 [[베이징]] 등으로 내려오고 한족과 동화되기 일쑤였으며 그나마 유목민스러운 문화를 아직 많이 갖고 있었던 외몽골 왕공들의 경우에도 오랜 평화에 젖어있었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청나라는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서 팔기군 병력에게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유명무실한 오합지졸로 전락해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 이어진 전란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연패를 거듭했다. 아편전쟁 때는 몽골 호르친부 출신의 친왕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이끄는 팔기몽고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폭우처럼 퍼붓는 유산탄과 머스킷 사격에 영불연합군의 대열에 거의 다가가지도 못하고 참담하게 패배했다. 이때, 영불연합군은 포탄이 터져서 사방으로 폭압과 파편을 날리는 작렬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만몽팔기는 영불연합군의 근처에 거의 다가가지도 못한 채 전멸해버렸다.[* 사실 이때, 셍게린첸이 이끌던 팔기군 부대는 기병대 중심이긴 하지만 의외로 포병까지 제법 데리고 다니는 등 구성상으로 갖춰야할 것은 얼추 갖췄다. 그러나 문제는 성조 강희제 시절에나 쓰던 200년된 대포를 쓰던 포병대의 저질 화력이었다. 이 부분 때문에 팔리교 전투에서는 [[공성 전차]]에게 녹아내리는 [[저글링(스타크래프트 시리즈)|저글링]] 신세가 되었다.] 청불전쟁 때 역시 [[베트남]] 북부에서 일어난 육상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으로 남았던 팔기몽고는 근대화된 [[프랑스군]]의 [[기관총]]과 대포 사격에 분쇄되었다.[* 황당하게도 패주하는 와중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현지인들을 상대로 약탈과 강간을 일삼아서 원성을 샀다고 한다.] 청일전쟁 때는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팔기몽고 부대가 약탈을 벌여 조선인의 분노를 사고, 약탈에만 정신이 팔려있다가 그때를 놓치지 않은 [[일본군]]에게 사격과 포격을 당하기도 했다.[* 다만 청일전쟁 무렵 조선에 가장 큰 피해를 준 약탈은 일본군이 저질렀다. 청일전쟁 무렵 조선에 주둔한 240,000명의 일본군은 조선의 양곡을 300만 석이나 약탈했고 이로 인해 조선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다.[[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44211198|#]]] 팔기군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도 문제였지만 팔기군의 무장이나 전술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지 않았던 청나라 조정의 책임도 컷다. 비슷한 시기 서유럽의 창기병들이 총알을 막기 위해 철판으로 된 흉갑을 착용하고, 권총을 사용했던 것과는 반대로 팔기군은 기존의 재래식 갑옷과 활을 그대로 사용했다.[* 다만 서유럽의 총기병들은 이미 16세기부터 불씨 관리가 필요없는 [[휠락|치륜식 총기]]를 들고 다녔다는 것을 상기하자. 중국이라는 당대 초강대국 아래에서 유럽처럼 전쟁이 자주 벌어지지 않았던 중근세 동아시아는 기술 및 전술의 발전이 비교적 더뎠고, [[플린트록|수발식 총기]]는 실험적으로 만들어보거나 수입하는 정도로 그쳤으며 19세기까지 [[화승총]]이 주력이라 기병이 사용하기 매우 귀찮았기에 활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비교하자면 18, 19세기 청나라 남방의 화전을 일구고 사는 소수민족들이 종종 한족 농민들과 시비가 붙어서 반란을 일으킬 때가 많았는데 이때 진압하러 출동한 팔기군이 사용하는 활이 묘족이 입은 갑옷을 뚫지 못하면서[*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도 만주족들이 사용하는 활의 성능이 시원찮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오히려 청나라의 귀족 팔기군이 일개 화전민 나부랭이들의 총이나 활, 석궁에 역으로 당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이 시절 중국 남방 농민, 특히 묘족들이 많이 사는 귀주성 같은 오지는 일상 생활상이 많이 전투적이었고, 농민들도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자. 화전민 나부랭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카리스마 있는 반란 지도자들 아래 모이면 바로 백련교도의 난, 태평청국의 난 같은 청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든 거대 반란들의 주역이 되었다.] 전술적 활용 역시 문제였는데 전열보병이 등장한 이후, 기병의 기본적인 역할은 아군의 포병/보병을 치러 들어오는 적 기병에 대한 요격이 주가 되었는데 팔기군을 활용해야하는 청나라의 보수적인 장군들은 팔기군이 청군의 핵심이라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매달릴 때가 많았고, 상술했던 것처럼 태평천국 운동 당시 태평천국군의 전열보병에게 팔기군을 돌격시켰다가 역으로 대패를 당하는 추태를 보였다. 결국, 이 모든 땜빵은 서양인과 한족으로 구성된 '''[[상승군]]'''이 맡아야 했다. 왜냐면 아편전쟁이야 상대가 세계 최강의 영국군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태평천국]]은 자국의 반란군 무리인데도 이들과 전면전 상태에 돌입하면 달아나기 바빴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팔기군이 형편없었다. 심지어는 태평천국군과의 교전을 두려워하며 일부러 천천히 추격하거나 진군로를 수정해서 빙 돌아갈 정도로 시간을 끌며 전투를 피하는 등, 한심하고 덜떨어진 모습까지 보였다. 이들이 너무 무능한 데다가 남방 한족의 녹영도 질이 형편없을 정도로 떨어졌기 때문에 태평천국군의 진압은 서구 열강들의 원조군과 향촌 민병집단인 '''단련'''(團練)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게 된다. 특히 난징에 주둔한 핵심 병력이 태평천국군에게 패배하여 난징을 빼앗기면서 청나라는 사실상 군사력이 전무한 상태임을 드러냈고, 연이어서 8개국 서방 연합군이 텐진을 지나 베이징까지 함락하여 들어오면서 청나라의 중앙군은 존재 차제가 없어졌다. 이때, [[후난 성]]의 한족 선비들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이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했고, 이후로 이홍장이 실권을 잡으면서 의용군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벌|북양군]]'''이 만들어졌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도 혁명군에 제대로 맞서 싸운 쪽은 대부분 북양군벌 세력들이었고, 팔기군은 거의 국민당 혁명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양군벌이 혁명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청나라는 혁명군에 맞서 싸울 제대로 된 군대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고, 허무하게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팔기군의 약화와 추태는 의외로 청나라 멸망 이후로도 큰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한 스노볼링 악재까지 초래했으니 바로 중국 군벌 시대의 난립이었다. 팔기군이 제 기능을 했으면 애초에 청나라가 그리 망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청나라 자체는 망해도 [[위안스카이]]든 [[우페이푸]]든 [[장쭤린]]이든간에 중앙 군사력을 장악했으면 나라 전체를 석권할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팔기군의 쇠퇴로 인하여 애초에 청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중국 전체에서 군사력은 베이징 중앙을 벗어나 지방의 군벌 세력들을 향해 기울어진 오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국의 통일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되었다. 북양정부는 과거의 권위를 되찾겠답시고 삽질하다가 철도 국유화라는 폭탄을 내던져 신해혁명으로 일어난 신군에게 무너졌고, 그 신군도 권력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위안스카이에게 칼자루를 쥐어줬다가 온갖 부정부패와 권력욕에 눈이 멀어 국가 건설 이념을 뒤집어 버리는 미친 짓으로 휘청이기 바빴으며, 간신히 다시 세운 중화민국 정부도 각지에 난립한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 같은 지방 군벌 세력을 때려잡는 데 기나긴 시간과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야 했다. 간신히 북벌을 완수했더니 이젠 같은 편에서 싸웠던 공산당 탄압에 눈이 멀어 일본의 만주&본토 침략을 외면하기 바빴고[* 다만 무의미한 삽질은 아니었던 게, 공산당이 궤멸 직전까지 몰려 벼랑 끝에서 실행된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이 이 시기에 있었다.], 지도자에게 총구를 겨누는 극약 처방을 통해 이루어낸 2차 국공합작으로 간신히 대응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국민당은 누적된 손실과 부정부패로 기회를 잡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몰락하고야 만다. 팔기군의 약화로 인해 생긴 중국 전체의 군사적인 권력 공백은 결국 청나라가 망하고도 반세기가 지난 중공이 집권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셈이다.[* 군사력이 약했다기보단 반세기 내내 춘추전국시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