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기군 (문단 편집) == 역사 == 팔기군은 [[청나라]]의 시조가 된 건주부 [[여진족]]의 [[칸]]인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했다고 전하며[* 원래 [[청나라]]는 [[누르하치]]와 슈르하치 형제가 거의 공동으로 통치하던 체제에서 시작된 나라였다. 이후 슈르하치를 제거한 누르하치는 동생의 부락을 반으로 나눠서 조카였던 아민에게 반만 세습시켜 주고, 자신의 몫을 2남 다이샨, 5남 망구르타이, 8남 홍타이지에게 분할 세습하니, 이들이 '''4대 버일러'''들이었다.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키면서 사촌인 아민과 형인 망구르타이를 제거했는데, 아민이 가진 세력을 다시 반으로 나눠서 반은 자신이 통제하고, 남은 것을 아민의 동생이었던 지르가랑에게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팔기회의에서 나온 구도로 두 황기는 홍타이지가 거느리고, 두 홍기는 다이샨이(다이샨이 두 홍기의 기주를 담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다이샨과 그의 아들이 기주가 되었다.), 두 백기는 [[아이신기오로 도르곤]]과 도도 형제가, 정람기는 장남인 호오거, 양람기는 지르가랑이 통솔하는 형태가 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청나라 제도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때 팔기군 중에서 상위 3개 깃발군 즉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 통틀어 '''상3기'''(上三旗)라고 칭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아민 제거 이후로 정람기가 황제의 직속이었으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섭정이 되면서 정백기와 위치가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황제 직속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황색'''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보니 상3기 중에서는 정백기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옹정 연간에 명나라 주씨 황실의 후예들을 연은후로 봉하면서 황제 직속 상3기로 편입시켜 신분을 보장할 때도 명나라 황족을 정황기나 양황기에 올릴 수는 없다고 하여 정백기 한군으로 편입시킨 것이나, 황후 및 황태후의 친가는 만주 정•양황기에 속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후궁 출신 황후 및 황태후의 일가를 편입하는 것이 그 예이다.][*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타타라 잉굴다이]]가 정백기 출신이었다.]는 [[황제]]의 직속부대였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 통틀어 '''하5기'''(下五旗)라고 칭한다. 이 하5기 중 정람기는 본래 상3기에 속했지만 순치 연간에 정람기주 호오거의 옥사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었으며, 정백기가 황부섭정왕 도르곤의 지휘를 받는 상3기로 승격되면서 자리를 바꿔야 했다. 이후 이 정백기는 도르곤의 추탈 이후에 황제 직속으로 편성되었다.]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었다. 각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의 여부는 청나라의 권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실제로 청나라 초창기의 황족 권력자들은 '어떤 기 출신'이라는 후대 인물들 같은 신분 표시가 무의미했다. 익숙해질만 하면 자기 소속이 바뀌고 동료의 소속이 바뀌고 깃발이 바뀌니 그냥 누르하치나 홍타이지가 시키는대로 [[까라면 까]]야지... 심지어 단순히 황제 등극을 위해 '황기'를 다 자기가 가져야겠다며 색깔론(?)을 주장하여 군단의 구성원은 그대로 냅두고 색깔만 바꾼 경우도 있었다. 홍타이지 시절 도르곤 3형제가 앞서 누르하치한테 물려받았던 양황기 대신 홍타이지가 배정받았던 백기를 받는 교환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사람 빼고 깃발만 바뀐 격이었다. 물론 이 백기도 도르곤과 도도의 양백기, 정백기 교환을 거쳐 훗날 도르곤 추탈 이후 황제 직속으로 편입되기는 한다.],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이후인 세종 [[옹정제]] 시기 [[군기처]]가 설치되고, 철모자왕들 중 황제 직속이 아니었던 하5기의 기주를 당연직으로 세습한 '''숙친왕'''(호오거계, 양백기), '''예친왕'''(다이샨계, 정홍기), '''극근군왕'''(요토계, 양홍기), '''예친왕'''(도도계, 정람기)[* 도르곤 숙청과 호오거의 복권 과정에서 기주 직위 교통정리가 다시 이뤄지며 호오거의 가문이 양백기를 세습하고, 도도의 가문이 정람기를 세습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도르곤 사망 직후인 순치제 시기에 이미 도르곤/도도 격하와 호오거 복권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평가가 옹정제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건륭제시기가 되면서 강희제시기에 비록 숙청되었지만 좋은 평가를 받던 [[구왈기야 오보이]]에 대한 격하와 함께 도르곤/도도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의 후손들이 鐵帽子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도르곤에게는 자녀가 없었던 관계로 도도의 자손 중에서 후계를 이어가도록 했기에 아마도 도도의 후손이 기주가 된 듯하다.]], '''정친왕'''(지르갈랑계, 양람기)[* 이쪽 가문은 '''[[기상정변]]''' 때 탈탈 털렸다. 당시 기상정변의 주역인 [[이혁보국군왕 숙순]]과 숙순의 형인 정친왕 단화, 세종 옹정제의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인샹]]의 후손이었던 [[이혁이친왕 재원]]이 서태후와 공친왕에게 숙청당해 재원과 단화는 자결을 명령받았고, 숙순은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친왕과 이친왕의 작위 역시 먼 친척 동생들에게 넘어갔다.]들의 권한을 분산시켜 보오이(포의)들에 대한 직접 관할권만 남긴채 좌령, 참령, 도통 등에 대한 임명권[* 팔기 내 관직에 있어서도 출신 기에 대한 일관성은 거의 없어졌다. 예를 들어 정람기 출신 인사가 능력을 입증하여 황제의 신임을 받아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에서 만주, 몽고, 한군도통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고종 [[건륭제]]의 총신인 [[니오후루 허션]]도 상3기가 아니라 정홍기 출신이었다.]은 모두 황제가 통제하는 팔기도통아문으로 넘겨, 사실상 팔기 전체가 황제의 1인 영도하에 종속되었다. 팔기군은 1601년 태조 누르하치가 [[여진족]] 각 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했다. 이후 만주족이 [[내몽골]] 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바요트 등의 [[내몽골]] 거주 할하계 부족들,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 등 [[내몽골]]의 [[몽골인]] 부족들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요동]]을 함락하면서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시켰다. 이때 [[만주족]]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 [[몽골인]]은 '''팔기몽고''', [[한족]]은 '''팔기한군'''이라 칭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의 성씨도 43개나 포함되어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86901.html#csidx253f2712e38f9a88283d897d728454c]] ]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사르후 전투|사르후 대전]]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의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었다.[* 베트남 하노이 부근의 '''응옥호이'''(玉回) 마을에는 낌(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18세기 말 후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썬 출신 3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팔기군 200,000명에 포함되어 있었던 이른바 '조선팔기'의 병사들 중 일부가 떠이썬군의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출처: 최병욱 《동남아시아사》) 그 외에도 청나라 황제의 비빈들의 목록을 보면 조선의 성씨+기야(佳)를 붙인 여성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들 중 일부는 만주팔기의 솔호 니루 출신 여성들이었다. 이들 가문에서는 예부상서 김상명 같은 네임드도 있었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드나드는 조선 사신들과 교류하며 혈연정치로 서로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심지어 성조 [[강희제]] 시절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코사크]] 병사들 중 일부가 상3기인 양황기에 편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몽골 오이라트계인 [[준가르]]를 갈아엎으며 [[외몽골]], [[칭하이성]], [[티베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 [[쓰촨성]] 서부 등 서부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튀르크]]계 부족들이나 [[티베트]]인, [[오이라트]]인 등도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원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데 있어서 지배 집단으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팔기몽고[* 나중에 만주 팔기의 [[군마]] 부족이 심각해질 때, 팔기몽고 기병대가 실질적인 청나라의 주력 기병부대가 되었다.], 팔기한군 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한군과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팔기만주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팔기몽고가 그 다음, 그리고 팔기한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 인원은 입관 당시인 [[1644년]]을 기준으로 팔기만주가 40~45%가량을 차지했고, 팔기몽고 22%, 나머지가 팔기한군이었다.[*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이후에 팔기군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팔기한군은 고종 [[건륭제]] 치세에 대거 출기 조치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팔기한군이 몽골이나 만주 출신에 비해 한족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 쟤네는 어쩔 수 없다." 는 핑계로 한족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팔기한군 기인들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이고,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실, 기인들은 여러가지 혜택과 대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대다수의 팔기한군들은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서 대우가 나빴기에 강등되는 것이 가족의 생계에 유리했지만, 팔기한군 중에서도 일부는 황제 및 만주족 왕•공들과 관계를 구축하면서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세종 옹정제 초년 준가르 정벌군의 총수였던 [[연갱요]]나 성조 강희제의 외척이었던 동씨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원래 한화한 여진족 가문이었으나 [[명청교체기]]에 후금에 귀부하여 개국에 공을 세운 덕에 무늬만 한군이지 사실상 만주족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강희제 즉위 후에는 [[효강장황후]]와 가까운 일족들이 양황기 만주로 편입되고 '''퉁기야씨'''로 사성받았다. ~~하지만 결국 사이좋게 옹정제한테 찍혀서 깨강정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일반 한족으로 강등된 팔기한군 출신 한족들의 후손들 중 일부가 자기 조상이 팔기군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만주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만주인들은 한인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도 업신여기곤 했다. 강희 연간에 같은 사행길에 올라 여정을 소화한 학자와 군인이 제각기 작성한 [[김창업]](정사 김창집의 동생)의 《노가재연행일기》와 최덕중(부사 윤지인의 수행군관)의 《연행록》에 따르면, 비록 정확히 어떤 가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청나라의 종실 여성이 친정에 왔다가 남편인 몽골 왕에게 돌아가는 행렬을 보고, 황족 여성이 더러운 몽골인들한테 시집간 것을 만주인들이 아깝게 여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런 팔기몽고의 왕공들은 내몽골의 초원이나 사막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빚어진 만•한 갈등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파일:QingEmpire.jpg]] {{{+1 주방팔기(駐防八旗)의 분포도({{{#990099 •}}}) }}} ,,청나라는 기존의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활용하여 주방팔기를 배치했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했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 내성에 거주하는 '''금려팔기'''(禁旅八旗)와 각 지역의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시켰다. 이는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가 되었다. 각지에 파견되어 있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청나라)|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팔기 자체가 만주족에 대한 일종의 군사-행정체계이자 예비군 동원 체제였으며, 만주족의 정체성이었다. 모든 만주족을 팔기에 소속시킴은 물론 일부 몽골인들과 한족 또한 팔기에 소속시켜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생겼다. 심지어 19세기에도 팔기한군, 팔기몽고 소속 기인들은 민인들은 잘 모르는 만주어를 구사하는 등 의식주 전반에 걸쳐 한인, 몽골인보다는 만주인에 가까운 특징을 보였다. 이들은 각지의 대도시에 존재했던 특수 행정구역이자 전용 주거지역인 '''팔기주방'''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고, 함부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으며, 만주인은 자유롭게 한인 여자를 취할 수 있었지만 한인은 만주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의 원래 본거지인 동북의 만주에서조차도 한인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는 만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한족으로의 동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만주족만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피지배층인 한족과의 충돌과 한족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방팔기는 각 지방의 치안 유지 역시 맡았으며, 반청복명 운동 등 불순한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삼번의 난]] 진압도 [[푸젠성]], [[광둥성]]의 주방팔기 몫이었으며 대만 원정 때도 푸젠과 저장 지방의 한군팔기들이 대거 참여해 결국 정씨 왕국([[동녕 왕국]])을 3대만에 간판 내리도록 했다. 이후 광동의 주방팔기는 팔기한군의 대거 방출로 전력이 약화된 가운데, [[1841년]] [[영국]]과 치른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고, 그 후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이나 [[염군]]의 난 등도 제대로 진압 못하고 소모전이 돼 치명적인 무능함을 천하에 노출시켰다. 이때문에 한족 관료들인 [[증국번]]과 [[이홍장]] 등이 모은 [[상승군#s-1]]으로 대란을 진압해야 했다. 사실 만주족의 주축이 된 건주여진은 수렵과 농경을 겸한 민족으로 순수 유목 기마민족과는 좀 달랐다. 그래서 사냥을 다닐 때 각 깃발별로 제대를 편성하던 습관이 팔기의 원조가 된 것이었다. 물론 여진족이라고 아주 유목민이 아니었던 건 아니었으며 북만주와 연해주의 야인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마민족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지역들은 건주부의 영역인 남만주가 농사가 가능하고 숲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척박하기 짝이 없어서였다. 원래 퉁구스족 자체가 [[돼지]]와 [[순록]]을 방목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남하하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게 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건주여진은 일찍이 중국이나 한반도를 통해 문명화된 지 오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