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업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파업은 '''[[기원전]] 12세기''' [[고대 이집트]]의 [[https://ko.wikipedia.org/wiki/람세스_3세|람세스 3세]]때라고 한다. [[파라오]]의 장례용 [[신전]][* 흔히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즈음에는 이미 피라미드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되었다.]을 짓던 인부들이 [[급료]]로 받는 [[빵]]의 배급이 늦어지자 인부들이 [[높으신 분]]을 불러달라 요청을 한다. 이 과정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으며, [[https://libcom.org/history/records-of-the-strike-in-egypt-under-ramses-iii|이 링크]]에서 내용도 확인 가능하다. 참고로 파업이 일어났던 도시 데이르 엘 메디나는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을 짓던 노동자들이 모여살던 마을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저 때의 파업도 온건한 파업이 아니라 가족들을 데리고 신전으로 쳐들어가 밤샘 농성을 벌였고 심지어 일부는 급료를 지불하지 않고 쫓아내면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하겠다는 [[신성모독]]적인 발언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람세스 3세가 밀린 급여의 일부를 지급하고 서신으로 추후 밀린 급여 전액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해 잘 마무리되었다. 물론 다른 왕의 무덤 얘기긴 하지만 진짜로 노동자가 자기가 지었던 [[왕릉]]을 도굴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덧붙여, 이런 파업 사례는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노예보다는 자유민인 휴경기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의 근거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고전 시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파업은 [[로마 공화국]]의 [[성산 사건]]으로, 평민들의 지속적인 권리 신장 요청에 불복하는 귀족들에 대항하여 시민들 '''전원이''' 파업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도망간 시민들은 아예 로마 밖에 새로운 도시를 지으려 했다.] 귀족들이 평민의 지위를 결국 인정하고 [[호민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