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르티아 (문단 편집) == 문화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in_of_Arsaces_I_of_Parthia.jpg|width=300]] 시조 [[아르사케스 1세]]의 주화. 스키타이식 뾰족한 가죽 모자와 뒷면의 활을 볼 수 있다. 시조인 아르사케스 1세의 주화에서 그 초창기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초창기 파르티아 지배층은 이란어군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사치스러운 고급 문화를 향유하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지배층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 집단이었다. 초창기 파르티아의 이웃이나 적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리스-박트리아 같은 헬레니즘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초기 파르티아는 동전을 그리스식으로 새기고 "그리스인 애호자(필헬레노스)"라는 어구가 포함된 그리스어 명문을 넣는 등 헬레니즘에 상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파일:HelioclesCoin.jpg|width=300]] 그리스-박트리아의 헬리오클레스 1세의 주화 [[파일:Antiochus IV Epiphanes Morkholm.jpg|width=300]]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의 주화 [[파일:미트리다테스 1세.jpg|width=300]]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의 주화 양식이 거의 비슷하다. 명문도 확실히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이 드러나며, [[카르헤 전투]] 이후 참수된 크라수스의 머리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배달될 당시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과 함께 그리스식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국가들이 쇠퇴하고 몰락함에 따라 그 영향력은 점차 약해졌으며, 이란 문화가 크게 부흥하면서 거기에 희석되고 융화되었다. 물론 아르사케스 왕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특별히 페르시아 문화를 장려하고 중흥시키려 노력했다거나 헬레니즘 문화를 박해하고 금지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헬레니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안그래도 적던 그리스계 거주민들이 거의 사라져 가고, 수백여 년의 전통을 가진 페르시아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성하면서 아르사케스 왕조 지배층도 이를 받아들인 듯하다. [[파일:시나트로케스 1세.jpg|width=300]] [[파일:볼로가세스 4세.jpg|width=300]] [[파일:Shapuri Coin.jpg|width=300]] 위로부터 파르티아의 [[시나트로케스 1세]]와 [[볼로가세스 4세]],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의 주화. 위의 두 주화는 각각 파르티아 중기와 말기에 해당하는데, 왕의 면상을 새긴 앞면은 동방 삘이 나게 많이 변했지만 뒷면을 보면 왕조 말기까지도 헬레니즘적 모티프와 그리스 문자로 된 명문이 잔존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문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불의 제단이 새겨진 사산 왕조의 주화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모두 [[왕중왕]]을 칭했지만, "šāhān šāh ērān ud anērān"이라 하여 페르시아어를 쓰고 [[이란]]의 정체성이 강조된 사산 왕조의 칭호와 달리 파르티아는 "ΒΑΣΙΛΕΩΣ ΒΑΣΙΛΕΩΝ ΑΡΣΑΚΟΥ", 즉 '왕중왕 아르사케스'라고 그리스어를 썼다. 종교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앙집권적 [[조로아스터교]] 교단 조직이 와해된 후 [[아후라 마즈다]]의 조력자로써의 위치에 머무르던 [[미트라]](메흐르)와 [[아나히타]]가 주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미트라의 경우, 왕의 이름(미트리다테스-메흐르더드)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며, 아나히타 신전의 대제사장은 사산 왕조 초기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들 외에도 유대교, 불교, 초창기 기독교 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누렸다. 헬레니즘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초창기에는 [[그리스 신화]]의 신격과 조로아스터교의 신격이 뒤섞여서 제우스-아후라 마즈다, 아폴론-미트라 같은 식으로 대응되기도 했다. 의외로 불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파르티아 동부에서부터 페르시아 만 일대에 많은 불교 사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파르티아인들은 자체적인 역사 기록을 충분히 남기지 못하고 이들과 이웃한 그리스인-로마인들은 불교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 서양 역사 기록에는 남지 못한 듯 하다. 파르티아 지배층들은 대부분 조로아스터교 혹은 그 변종들을 신봉했지만, 이를 특별히 국교로 만들고 장려했던 것 같지는 않다. 조로아스터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던 아케메네스 왕조나 기독교와 불교, 마니교 등을 박해했던 사산 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특히 왕조 교체 이후 강력한 조로아스터교 교단과 교리, 위계질서를 구축하던 사산 왕조 초기, 파르티아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 나태와 타락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다. 언어는 중세 이란어군의 한 분파인 파르티아어를 썼는데, 사산 왕조 이후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Pahlavi)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점차 사멸했다. 파르티아어 기록도 사산 왕조 초기의 것만 조금 남아 있다. 기록을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공용 문자 중 하나였던 [[아람 문자]]를 쓰기도 했으며, 상술한 바대로 주화에 그리스 문자를 쓴 것을 보아 그리스어 역시 지배층 사이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높다. 문학은 주로 (사산 왕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음유시인들이나 악사들이 부르는 노래와 시로 향유되었으며, [[피르다우시]]가 남긴 《[[샤나메]]》(왕의 책)의 일부 에피소드에 파르티아 귀족들을 다룬 내용이 있다. 절벽이나 주화에 새겨진 명문 등을 제외하면 파르티아인 자신들이 남긴 문자 기록은 매우 드물고, 하물며 역사 기록은 말할 것도 없다. 사산 왕조는 물론이요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 때보다도 부족해서 이란/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문헌 사료가 적은 시기라고 할 정도다. 파르티아 역사 연구는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단편적인 기록과 유물/유적들을 발굴, 해석하는 고고학과 금석문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