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르티아 (문단 편집) === 숙적 로마와의 조우 === 기원전 1세기, 동방 전선이 대강 정리되자 파르티아는 본격적으로 서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그때 마침 [[아르메니아]]와 마주치게 된다. 아르메니아 역시 막 [[카프카스]] 산맥 일대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지만 파르티아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속국이 되었다. 이때 [[로마]]의 [[술라]]와 파르티아 사이에 "유프라테스 강을 양국의 경계로 하자."는 협정이 맺어졌다. 그런데 파르티아에 복속되어 한때 볼모로 잡혀 있었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왕이 되면서 아르메니아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반면, 파르티아는 왕위 다툼과 [[사카족]]의 재침공으로 오히려 국력이 약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티그라네스 2세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고, [[시리아]]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까지 차지하는 등 그 위세를 떨치며 파르티아의 영토까지 빼앗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로마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를 연속으로 패퇴시켜 아르메니아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는 동방에 남은 유일한 강국인 파르티아에게 누차 구원을 요청했지만, 파르티아는 모두 거부했다. 물론 티그라네스 2세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고, 로마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도 없었으며, 사실 왕권을 둘러싼 갈등과 내전 때문에 남의 전쟁에 신경쓸 처지도 못 되었다. 어쨌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는 나란히 로마의 속국이 되었지만 로마의 진군은 멈출 줄 몰랐고, 그 결과 양국 사이에 [[카르헤 전투]]가 발발되었다.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파르티아는 크라수스의 군사적 무능과 명장 [[수레나스]]의 뛰어난 지휘에 힘입어 로마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파르티아는 역습을 시도했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살아남은 카시우스[* 카이사르 암살에 관여한 그 카시우스 맞다.]의 반격으로 격퇴당했다.[* 이때의 패전은 파르티아에 수레나스가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는데 대공을 세운 수레나스를 질투했던 [[오로데스 2세]]가 수레나스를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내전이 벌어지자 카이사르 반대파를 지지하며 재침공을 감행,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와 레반트 전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박살나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양분한 뒤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얄짤없이 얻어 터지고 점령지들을 토해내야 했다.([[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안토니우스는 내친 김에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파르티아 원정]]까지 시도했는데, [[크라수스]]와는 달리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산악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 국경까지 무사히 진군하여 [[아제르바이잔|아트로파테네]]의 수도 프라스파를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공성은 실패했고,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피해를 입은채 시리아로 철군했다. 직접 공략에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외교적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옥타비아누스와의 문제 때문에 더이상 동방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원정을 포기했다.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천명했고, 협상을 통해 카르헤 전투 당시 빼앗긴 군단기와 생존 포로들을 송환받았다. 이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끼인 아르메니아를 어느 쪽 편으로 두는가를 두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전쟁은 아르메니아 땅에서만 이루어졌고 양측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네로]] 시기에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해 아르메니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확보하기도 했다. 당시 파르티아의 군주인 [[볼로가세스 1세]]는 동생 티리다테스의 양보로 즉위했다.[* 이때 볼로가세스는 장남이긴 했지만 첩실의 소생이라는 태생적 약점이 있었고, 티리다테스는 정실 소생이라 사실 계승 정통성만 따지면 티리다테스가 더 높았는데도 티리다테스 본인이 왕좌에는 장남이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면서 양보한 것이었다. 볼로가세스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고마웠을 것이 당연한 일.] 이에 티리다테스에게 보답하는 동시에 반대파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로마는 5년 동안 파르티아와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전쟁]]을 치른 끝에 [[티리다테스 1세(아르메니아)|티리다테스 1세]]의 즉위 행사를 로마에서 치르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이 일로 인해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