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르티아 (문단 편집) === 초기의 확장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Rome-Seleucia-Parthia_200bc.jpg]] 기원전 200년 무렵 셀레우코스 왕조와 파르티아의 영역. 여기서 불과 100년 만에 시리아를 제외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거의 모든 영역이 파르티아로 넘어갔다. 전술했다시피 셀레우코스 왕조의 주적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으며, 양국은 접경이자 요충지대인 코엘레-시리아, [[페니키아]], 유대 등을 두고 끊임없이 투쟁했다('''[[시리아 전쟁]]'''). 따라서 한정된 숫자의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사력에 의존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는 머나먼 동방에 주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가 일시적으로 파르티아를 수복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사케스 1세의 반격을 받아 도로 빼앗겼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재위: 기원전 222~187)가 기원전 210년 대규모 동방 원정(일명 '''아나바시스''')을 시도하여 파르티아와 그리스-박트리아로부터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벌인 수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국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불과 수십년 만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방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파르티아는 [[미트리다테스 1세]](메흐르더드 1세)의 영도 아래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와 그 동쪽의 모든 셀레우코스 영토를 차지했다. 이를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원정을 추진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포로)와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전사)가 모두 패배하면서 동방에서 파르티아의 패권이 확실해졌다. 동방의 헬레니즘 왕국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그리스-박트리아]] 역시 내부 분열[* 그리스-박트리아가 인도 북부 일부 지역을 정복했는데, 이 정복지들이 [[인도-그리스 왕국]](India-Greek Kingdom)으로 따로 떨어져 나가서 모국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갖고 대립했다.]과 유목민들의 침입때문에 파르티아의 공세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이후 [[흉노]]에 패망한 [[월지]]의 일파인 대월지가 서방으로 이주해 [[스키타이]]의 일파인 [[사카족]]을 밀어내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켰다(BC 130). 이들은 파르티아의 동쪽 국경도 위협했으나, 파르티아는 왕이 전사하는 등의 고전 끝에 이들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는 [[인도-파르티아 왕국]][* 파르티아의 동쪽 변경에 세워진 왕조. 그 위치는 항목 맨 위의 지도에 나와 있다. 동전에 새겨진 왕의 이름을 따서 '''곤도파레스 왕조'''라고도 한다. 남은 유물이 파르티아의 양식과 유사해 '인도-파르티아'라 불리지만, 당시 동부의 여러 이란어족 분파들이 연합한 나라로 추측된다. 한때는 파르티아와 대등한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파르티아의 속령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단명한 왕조인 데다 남은 사료가 부족해서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이 형성되고, 이후 대월지계가 북인도에 건설한 [[쿠샨 왕조]]도 파르티아와 화평을 이룸으로써 파르티아의 인도쪽 변경은 안정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 최초의 수도는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있는 니사(Nisa)였다. 니사는 명군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중건되어 이름도 '미트리다테스의 도시'(Mithradakirt)로 바뀌고 왕실 묘역이 자리잡는 등 주요 도시로써의 위상을 유지했으나, 기원후 1세기경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아르사케스 1세에 의해 파르티아가 점령된 후에는 그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가 새 수도가 되었다.[* 헤카톰필로스란 [[그리스어]]로 '100개의 성문'이란 뜻인데, 이는 성문이 많이 있는 대도시를 가리킬 때 가끔 쓰이던 별칭이었다고 한다. 파르티아 고유의 도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메디아]]의 [[엑바타나]]로 수도를 잠시 옮겼다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케이아로 옮겼다. 파르티아 지배층은 셀레우케이아 도시 안에 살지 않고 그 옆에 임시 정착촌을 만들어 살았는데, 이것이 점차 신도시로 발전하여 파르티아 후기와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 되었다. 기원후 1세기 무렵이 되면 겨울에는 크테시폰이, 여름에는 [[수사]]나 엑바타나가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