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라오 (문단 편집) == 왕의 무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피라미드/이집트)]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왕가의 계곡)]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heops-Pyramid.jpg|width=100%]]}}} || || [[쿠푸의 대피라미드|{{{#A0522D '''쿠푸의 대피라미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amses-v-tomb-luxor-053.jpg|width=100%]]}}} || || {{{#A0522D '''[[왕가의 계곡|{{{#A0522D '''왕가의 계곡'''}}}]]에 위치한 [[람세스 6세|{{{#A0522D '''람세스 6세'''}}}]]의 무덤'''}}} || 신인 파라오가 죽는다는 것은 그저 왕의 죽음이 아니라 세계의 대사건이었으므로, 파라오는 생전에 후계자를 점지해 미리 권좌에 앉혔다. 파라오가 죽으면 그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지하에 매장했다. 초기에는 직육면체의 건물을 만들고 그 아래 지하실에 미라를 안치하는 방식을 썼다. 이걸 '마스타바'라고 부른다.[* 그 납작한 모습이 벤치와 비슷하다고 해서 [[아랍어]]로 벤치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어원을 따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마스타바가 점점 층층이 쌓인 모습으로 발전했고, 이렇게 계단식의 초기형 피라미드가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3왕조의 시조 [[조세르]]의 피라미드. 시간이 더 지나자 층이 구분된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겉면이 매끈한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최초로 매끈한 사각뿔 피라미드를 지은 건 [[쿠푸]]의 아버지이기도 한 [[스네프루]]다. 무덤을 기껏 지어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아 무려 3번에 걸쳐서 피라미드를 지었던 파라오이기도 하다. 스네프루의 뒤를 이은 인물이 그 유명한 [[쿠푸]]다.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주인공으로, '''3,871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무덤을 지으며 피라미드 건설의 정점을 찍었다. 쿠푸의 아들 [[카프레]]도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그 손자 [[멘카우레]]도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기자에 3개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지었다. 가히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의 황금기였던 셈.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피라미드 건설도 점차 파라오에게 관심을 잃어갔고, 피라미드 대신 바위에 암굴을 파서 그 안에 미라를 안치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피라미드]]에서 [[왕가의 계곡]]으로 묘지가 바뀐 것은 피라미드 건설 비용이 지나치게 비싼 이유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도굴]] 때문이다. 피라미드 안치 후 며칠 만에 도굴당하는가 하면 아예 피라미드 자체가 허물어져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후기 파라오들의 선대 피라미드에 대한 인식도 성스러운 것만이 아니어서 선왕의 피라미드 자재를 떼어내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는 데 쓰곤 했다. 이런 상황이 몇 백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니 더이상 파라오들이 피라미드 건설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사방에서 잘보이는 큼직한 피라미드를 짓는 건 도굴꾼들에게 '내 무덤이 여기 있으니 제발 좀 도굴해달라'고 광고하는 짓이나 다름없었으니, 파라오들은 점차 피라미드 건설을 꺼리게 된다. 결국 [[도굴]] 문제로 [[왕가의 계곡]]으로 묘지를 옮겼지만, 도굴꾼들의 의지와 솜씨가 훨씬 위였다. [[투탕카멘]]은 때때로 기록조차 말살당할 정도로 당대에는 존재감이 없어, 오히려 심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극히 희귀한 사례다. [[투탕카멘의 무덤]]도 흔히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무덤 조성 직후에 몇 번 조금이나마 도굴당한 적이 있었다. 이후 입구가 파묻히고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진 것이다. 그 외에 [[이집트 제3중간기|제3중간기]] 시대의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이 유일하게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지만, 유물의 질도 투탕카멘의 것에 비해 훨씬 떨어지고 발견 시기가 하필이면 [[제2차 세계대전|1939년에 발견되어서]] 유명하진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