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틱꽝득 (문단 편집) == 영향 ==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으며,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면서 시선을 끌던[* 1963년 6월 8일 [[쩐레쑤언]]은 여성연대 운동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중립주의자로 고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불교를 사실상 공산주의 협력자라고 비난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에 민심은 더욱 분노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부인이자 역시나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었던 마담 누[* 서양에서는 '''[[드래곤 레이디]]'''라고 불렀는데 절대 좋은 의미에서 붙인 별명이 아니다. 용을 왕이나 황제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양과는 달리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드래곤은 [[묵시록의 붉은 용]]과 같이 사악한 악의 최고 자리인 [[사탄]]과 같은 존재인지라 그 의미는 '''마귀 같은 년''' 정도다. 이 사람의 부모는 불교도였으나 딸인 자신은 프랑스인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프랑스를 준거집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 분위기의 집안을 지긋지긋해하여 응오딘뉴와 결혼하자마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지만 불교 분위기가 지긋지긋하다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본인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정작 가톨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년 4월 15일~2011년 4월 24일]은 틱꽝득의 소신공양에 대해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고인드립|그에 비하면 불교 지도자 놈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뿐인데 말입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런 [[사탄드립|사탄도 차마 못 할]][* 이 정도면 [[기독교]] 입장에서도 분노할 수준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_PWM9gWR5E|고인에 대한 모욕]]을 해서 베트남 국민들의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모욕 대상을 보면 당연히 어지간한 [[쌍욕]]보다도 높은 수위다. 자기 말로는 서구화에 항의하는데 미국제 가솔린을 쓰고 있으니[* 서구화에 항의한다면서 미국제 가솔린을 썼으니 순수하게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계획된 것이 아니냐고 몰아갔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저네들이 활활 불타오르게 놔두고 우리는 그걸 보면서 박수나 쳐 주면 된다는 것이었으니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뚜껑이 안 열릴 수가 있나.]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뭐 저런 정신나간 미친 여자가 있어?"라며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미국인들도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 당장 케네디도 천주교 신자였다. 같은 천주교 신자여도 절대로 용납 불가능한 망언을 내뱉은 것이다. 아무리 종교가 다르다고 해도 저런 망언을 입에 담는 것은 오히려 종교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쩐레쑤언은 응오딘지엠 대통령 본인의 부인이 아닌 [[제수#s-2]]였지만 응오딘지엠이 독신주의자라 영부인이 없어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본인의 친정 오빠가 처형된 것에 앙심을 품고 반정부 세력에 대해 퍼스트 레이디로서는 부적절할 정도로 지나치게 극단적인 증오심을 표출했음은 물론, 굉장한 무개념이라서 오만가지 비리와 폭정에 관여하는 통에 [[베트콩]]의 선전에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미국 보수파들도 이를 두고 '''스스로 베트남 반공 세력을 좀먹게 한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더불어 미국 정부는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 문제의 절로 가서 위로할 정도였다.] 아무리 미국이 [[반공주의]] 국가이자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국가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심각한 [[고인드립]]은 용납이 안 될 정도로 대단히 질 나쁜 욕이었다. 엄청난 [[작열통]] 속에서 이를 의지로 버티면서 앞이 아닌 뒤로 넘어진 것은 '''미국인들과 베트남을 깔보던 사람들까지 감명받을''' 일이었는데도 그걸 두고 '바베큐'라고 비하한 것이니 그걸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가서야 발언이 경솔했다고 사과했지만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정신 못 차리고 불교도들의 저항을 강경하게 찍어눌렀고 8월 초 응오딘뉴가 사이공의 싸 러이 사원에 군경을 보내 짓밟아 반발심을 초래했다. 쩐레쑤언이 가사를 입었든 말든 외국인 선동자들은 모두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강경진압을 옹호한 것은 물론, 이를 두고 "1955년 [[사이공 전투|빙쑤옌 진압]] 이후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the happiest day in my life since we crushed the Bình Xuyên in 1955)"이라는 발언까지 하면서 불교 신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베트남 국민의 90%가 넘는 불교도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이게 다 빨갱이들의 준동일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런 막장 대응에 식겁한 백악관은 결국 응오딘지엠 정권을 종교를 탄압하는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미국은 1961년의 [[쿠데타]]를 묵인했으며 1963년 10월에는 백악관 주도로 응오딘지엠 교체가 논의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제거에 동의했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 남베트남의 군사 지도자들은 '''미국이 응오딘지엠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결국 1963년 11월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즈엉반민]](楊文明)[* 응오딘지엠이 직접 [[장군]]으로 임명한 것으로도 유명했고 이 사건 이후 만 12년도 못 되어 북베트남군에게 사이공이 함락될 때 잡혀간 마지막 대통령으로 더 유명하다.] [[소장(계급)|소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졌다. 한편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사이공의 한 [[성당]]으로 달아난 뒤 미국 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의 입장을 요청했지만 주 베트남 미국 대사 롯지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며 사실상 도움을 거절했고 자신은 누가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모른다면서 신변상의 이유로 하야를 권하고 쿠데타 세력이 만약 당신이 항복한다면 안전한 출국을 보장한다고 말하면서[* 쿠데타를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르는데 쿠데타 세력의 입장은 누구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을까?] 사실상 쿠데타 세력에 편중된 모습을 보였다. 실망한 응오딘지엠은 질서 회복에 노력할 것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인과응보|하지만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졌고 이후 동생 응오딘뉴(吳廷瑈 1910~1963)와 함께 11월 2일 오전 6시에 쿠데타군에게 항복했으나 군부에게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쿠데타군이 두 형제의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호송용 육군 [[장갑차]]를 보냈고 거기에 탑승하자마자 양손을 결박한 뒤 장갑차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탈출 중에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공개된 처형 직후의 사진은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총살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한편 응오딘뉴가 참혹하게 사살당할 때 방미 중이던 쩐레수언은 얼른 달아나서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를 떠돌다가 87세였던 2011년 4월 24일 [[이탈리아]] [[로마]]의 초라한 호텔에서 초라하게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죽을 무렵에 베트남 정부에 대해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베트남 정부나 여론은 '''"우리는 그쪽네 시체도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고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린치|당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 아직 많으니까]] 베트남에 오면 [[부관참시|당신 시체도 보전 못 한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해외에서 죽어라."'''며 --시체 보전하고싶다면 오지말라는 친절한--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베트남 정부도 이럴 만한 게 쩐레쑤언은 한때 해외를 떠돌면서 반공투사 행세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 생전에도 극단적인 반공 세력에게 지지받은 것을 제외하면 해외의 베트남 정부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저 여자도 다를 거 없다고 혐오했다.] 결국 쩐레쑤언은 이탈리아의 공동 묘지에 대충 묻혔다.[* 이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달렸을 영상의 댓글을 보아도 쩐레쑤언에 대한 욕설이 99%일 정도인 만큼 당시의 반응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방미 당시 두 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큰딸은 1967년에, 작은딸은 2012년에 차례로 사망했다. 사인은 공교롭게도 모두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말이 있다. 영화 [[왓치맨(영화)|왓치맨]]에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197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런 흐름이 이 사건과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틱낫한]] 스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 틱꽝득 이후 승려들의 소신공양은 [[티베트]]에서 다시 등장했다. 티베트 승려들의 소신공양도 틱낫한의 말처럼 [[티베트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압제자들의 마음에 무언가 일말의 경종을 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북베트남 정권에서는 틱꽝득의 소신공양 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이 붕괴한 것은 좋게 평가했지만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으며 혼란만 계속 이어진 끝에 사이공 함락으로 이어졌다고 보아 틱꽝득의 죽음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한동안 평가절하했다. 그의 소신공양 이전에도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승려들의 분신 사례가 북베트남과 중국에서도 역시 발생한 바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 사회주의 정권도 종교적 신념에 의한 소신공양을 반체제 행위로 보아서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분신 당시 틱꽝득의 의연한 태도와 심장 보존 등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도 유물론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사회주의자뿐 아니라 [[쩐레쑤언]]을 포함한 남베트남의 가톨릭 신자들 중 일부도 틱꽝득이 약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남베트남 출신 이민자들 중 일부는 '틱꽝득이 베트콩 첩자들에게 납치되어 마취당한 후 희생되었다'는 [[음모론]]을 지금까지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주장과도 어긋나는 데다 타당한 근거로 뒷받침되지 못한다. 당시 종교 탄압에 맞선 저항으로서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한국처럼 민주화되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베트남 역사와 교과서에서 크게 추앙받을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남베트남이 멸망하고 [[적화통일]]의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면이 있다. 실제로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에서 발표한 2022년 세계자유지수에서 한국은 83점으로 '자유국가'로 분류되고 그다지 상태가 좋지 못한 방글라데시도 '부분자유 국가'로서 39점인데 베트남은 '19점'으로서 '부자유 국가'로 선정될 정도로 타락하였다. 그렇다고 북베트남이 좋아할 리도 없다. 물론 '[[이이제이]]' 전략으로서 당시에야 남베트남을 멸망시키는 도구로서 악용할 수도 있었으나 이젠 자신들의 천국이 되었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으니 '저항의 상징'이었던 틱꽝득이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오히려 독재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처럼 종교도 인민들을 압제하는 수단이라고 봤고[* 조선에서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 정책을 택했던 것은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타락한 승려들이 정치에 개입하여 많은 부정부패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진 사대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처지가 바뀌자 승려들이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청렴함을 내세운 사대부조차 결국 타락하여 흥선대원군의 개혁 당시 도적떼라고 욕할 정도로 전락하면서 개혁의 명분이 됐다. 그리하여 '모두까기'에 가까웠던 공산주의자들은 [[인민해방군]]이란 거창한 이름처럼 진정 인민들을 해방시켜 주겠노라고 선언하면서 세력을 급격하게 불렸는데중국과 베트남은 자신들이 이전에 각각 욕하던 대만과 남베트남보다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오히려 대만은 초기에 많은 부정부패와 문제가 있긴 했으나 '''뿌리는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국처럼 조금씩 고쳐나간 끝에 정상적인 민주국가가 되었다. 남베트남에서도 징병제 반대 시위와 반전시위가 열릴 정도였으니 지금쯤 정상 민주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결국 부정부패 문제는 종교와 체제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공산주의도 이념이 나쁘다기보단 정부의 견제와 감시 시스템이 전무하고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절대권력자인 [[최고존엄]]이 탄생하는 등 고인물이 썩은 것이다.] '불교국가' [[티베트]]를 지배한 [[중국공산당]]이 내세우는 명분이기도 하니 [[베트남 공산당]]도 종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 베트남 정권은 물론, 해외에 망명한 남베트남 출신 이민자들도 가급적 언급하기를 꺼리는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