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투스 (문단 편집) === 황제 === 79년 6월 24일에 황제로 취임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이 티투스가 "제2의 [[네로]]"가 될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가 유대전쟁을 치르던 과정에서 만난 유대 공주 베레니케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정식 결혼하려고 한 일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티투스는 황태자가 된 후 [[돌싱]]이었으므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걸 본 시민들은 그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티투스는 끝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이 커플에 대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대체로 외국인에게 관대했음에도 이런 전력과 함께 외국인이 로마의 정치에 관계하는 것에는 선을 그었기에 야유가 쏟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티투스는 로마에 방문한 베레니케를 일부러 멀리하며 노력했지만, 매년 공주 생일에 선물도 보내고 관심을 가지며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유대의 공주가 누구였는가 애매모호하지만 헤롯 왕가 계열의 여인으로 추측된다.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했다고 하지만 티투스의 즉위는 아무 소란도, 걱정도 없었다. 티투스가 베레니케와의 사랑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티투스가 성격이 소탈한 데다가 국가를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열렬히 사랑해줬다.[* 이것은 친동생인 도미티아누스와는 대조되는 부분인데 도미티아누스는 거만하고 의심많고 사치스럽다고 엄청 까였다.] 하지만 티투스는 죽기 전까지 오래 살지도 못했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사실 후계문제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데 어차피 티투스에게는 12살 차이가 나는 형제 도미티아누스가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플랜 아래에서 그가 죽으면 도미티아누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형제가 성숙되기도 전에 티투스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는 거지만...] 더해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인기는 높아졌다. --관대한 황제-- 이는 시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티투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했다.[* 이 부분 역시 친형제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고소 등으로 원로원과의 사이가 극악이었다.] 실제로 티투스는 짧은 제위기간이긴 했지만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를 죽기 전까지 지켰다. 더해서 티투스는 남을 돕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인들에게 '하루를 잃어버렸다'고 한탄까지 했다. 이처럼 티투스는 선정으로 국민, 원로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온갖 대사건들이 ~~[[잭팟]] 터지듯이 줄줄이~~ 일어나는 바람에 재해대책을 세우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쉴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폼페이]]의 참사가 그의 재위 2달 만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하나만 터진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연달아 줄줄이 대사건들[* 2011년 3월에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 같은 사건이 연달아 계속 터진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다.''' 그리고 이때 에다노 관방장관이 나흘간 잠도 못 자면서 사태수습을 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던 걸 생각해보자. 이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이를 수습해야 했던 티투스의 건강에도 끔찍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재위 기간이 20년을 넘긴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관료]]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 황제는 모든 인사와 중요 서류 결재를 맡아야 했는데, 이것은 당연히 엄청난 격무이고 신체적으로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정을 슬금슬금 구축해가는 대사업'''을 진행하면서 44년간 황제 자리를 맡은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대신 과로로 빨리 죽었다--]이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폼페이]]시(市)의 매몰 등이 있었다. 이때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들도 멸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산에 초토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베수비오 화산에 피해를 입은 [[캄파니아]] 지방에 지원을 보냈으며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했다.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잇달았다. 4일간 벌어진 대화재는 티투스에게 ~~강제적으로~~ 로마 재건 및 리모델링을 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페스트까지 돌아서 질병퇴치 및 구제사업에 진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티투스는 황제로서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이 재해대책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재해현장에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그를 '인류의 총아'로 경모했다. 같은 해, 오늘날 우리에게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콜로세움|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티투스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검투사들과 맹수, 죄수들에겐 지옥이었던~~ 축하행사를 벌였다. 이후 콜로세움은 티투스에 이어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1개 층이 증축되었고, 총 4개 층을 갖춘 형태로 82년에 완공된다. 한편, [[테렌티우스 막시무스]]라는 인물이 [[네로]] 황제를 사칭하여 파르티아의 힘을 빌려 반란을 꾀했다. 파르티아는 처음엔 이 인물이 진짜 네로라고 여기고 적극 협력했으나, 나중에 가짜인 게 밝혀지자 처형했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티투스는 축하행사 와중에도 재해대책에 몰두해야만 했고, 치세 2년 만에 열병으로 쓰려져 죽고 말았다.(81년 9월 13일)[*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빨리 황위를 얻고 싶었던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도 기록하였다. --독살시켜 달라고 한 거 아니야? 얼마나 피곤했으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