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리우스 (문단 편집) == 상세 ==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는 인간의 일을 수행하는 한 인간이며 저의 큰 소망은 [[프린켑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고 후세들이 이러한 내 뜻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조상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여러분의 권익을 위해 신중하며, 위험한 상황에서 흔들림이 없고,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인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과 후세들은 내 명성에 넘칠 만큼 충분히 공헌하는 겁니다." >----- >'''[[타키투스]], <연대기>, 티베리우스 4-38, 티베리우스의 원로원 연설 중 일부'''[*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통치철학이자 인생의 가치관을 직접 언급한 말로 원로원 회의록에 실린 내용이라고 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티베리우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프린켑스로 있었는지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발언으로 평가받는데,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이들에게는 위선자, 냉혹한 프린켑스라는 증거의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고 있다.] 티베리우스는 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상속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황후(아우구스타)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기 전에 전(前) 남편 사이에서 낳은 친아들이다. 선대 황제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서 로마 역대 황제 중 최초의 부자세습 방식[* 친(親) 부자 세습으로 제위를 이은 최초의 로마 황제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있다.], 최초의 공동황제 즉위[* 로마 제정 시대 중 공동황제 개념으로 처음 즉위한 케이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이다.] 후 단독 세습 방식[* 부자세습으로 뒤를 잇는 황제들이 많이 사용한 방법이다. 대표적으로는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이 있다.]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고대 로마]]가 능력 본위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평가처럼 부자세습으로 즉위했어도 능력 면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먼치킨인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제대로 이어받아 로마 제국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또 오랜 기간동안 제 수명을 다한 국방, 행정, 세금 정책을 마련해 이후 원수정 황제들에게도 많은 부분에서 참고사항이 됐다. 덕분에 당대의 평가는 최악이었을지라도 후세에 이르러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잡았고,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별개로 당대 사람들에게 살아생전 폭군, 위선자 등의 온갖 소리를 다 들었고, 폐쇄적인 성격과 카프리 섬 은둔 통치로 인해 역대 로마 황제 중 종손자 [[칼리굴라]]와 함께 가장 많은 헛소문에 시달렸다.[* 거리 내 근거없는 뜬소문과 도시괴담급 이야기들을 집대성해 만들어진 역사책이 바로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겸 변호사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이다.] 그리고 이런 소문은 계속 퍼져나가 죽은 이후에도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되거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근대 이후 그가 재평가를 받으면서 현재는 역대 로마 황제 중 명군과 폭군 모두의 모습을 지닌 입체적 황제로 불린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제위 계승은 선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희망이 아니었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혈통을 중요시한 집착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황위를 물려주며 티베리우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인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 후임으로 하는 것까지 조건으로 붙여버렸다. 거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의 관계를 봐도 친자가 있는데 양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내전의 불씨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다른 왕조보다는 능력 본위라는 것이지 로마 또한 혈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왕조는 아니었다.][* 친구이자 사위인 아그리파를 비롯해 직계 남자친족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모두 요절해버렸다. 또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조카사위이자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자신의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중이라고 했고 여러 정황상 후계자가 되는 것이 진짜 유력했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집정관 선출 후,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 거행 직전 낙마사고로 요절해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 당시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했고 죽은 양자의 동상을 곳곳에 세워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70이 다 된 고령의 나이에 그나마 남아있는 남자혈육으로는 누나의 외손자인 대 드루수스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 외에는 없는 상태였는데, 이들마저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까지 갓 20대에 접어들거나 10대였고 제위를 곧바로 물려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 외에는 뚜렷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내용처럼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물려받게 된 셈이다.] 본인도 그 책임이 막중해 망설이는 상황에서 황제가 되기 전부터 원로원에게 주는 것 없이 대놓고 미움을 받은 탓에 여론도 최악이었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공동황제가 되어 원활하게 그 직위를 이어받았음에도 즉위 시작과 동시에 군대 반란을 비롯해 수많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후계자들인 조카 [[게르마니쿠스]]와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사망했는데, 친아들 사망 이후부터는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예 세상과 연을 끊고 섬에 틀어박혀 원격조정 방식의 통치으로 로마를 통치했다. 따라서 그의 재위 후반은 로마 역사상 비열함과 악랄함을 모두 갖춘 간신 [[세야누스]]의 음모와 활개 아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여자 황족들을 빼고 거의 전멸하다시피하고 만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가 근위대를 앞세운 공안통치를 하면서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에 장단을 맞추는 일까지 벌어져 후반기부터는 연이은 친족 숙청, 원로원과 황제의 대립 등으로 상당히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과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제정 시대 로마인들에게 이 부분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현대에 이르러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재평가를 받음에도 그의 재위 후반기 통치 스타일은 이후 로마 제정에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난받고 있다. 이런 국정 운영 스타일처럼 개인적 삶 역시 상당히 모순되고 골치아픈 세월의 연속이었다. 친부모와 양부를 통틀어 가계만 보면[* 친부모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라서 혈통적으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자체로 평가받는다. 부계는 위세가 대단한 네로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 가문 태생인 할머니를 통해 마르켈루스 가문의 피까지 이어받았다. 또 어머니 리비아는 본래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풀케르 가문 사람이라서 부모 양쪽을 통해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위세가 대단한 세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 여기에 더해 어머니 리비아의 법적 출신 가문이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배출한 평민귀족가문 리비우스 가였기 때문에 외조부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를 통해 소(小) 카토와도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대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자제로 로마 최고 부촌에서 태어났지만, [[아우구스투스|단 한명]] 때문에 가족사가 완전히 꼬여서 [[모든 걸 갖추었지만 불행한 사람|일생의 대부분을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확실한 결점이 있었다고 해도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건전한 사람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 뛰어난 지력과 교양, 높은 도덕심과 검소한 생활을 한 탓에 미움을 받아도 전형적인 공화정-초기 원수정 시대의 엘리트 귀족으로 평가받았다. 아울러 10대 후반부터 상당한 수준의 행정실무처리능력과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굉장히 깨끗했다. 그리고 로마 귀족들의 주요 덕목으로 여겨진 건전한 심성과 책임감 역시 상당히 뛰어났고, 주변 측근들의 기록[* 대표적으로는 티베리우스 휘하 군단장 등을 역임한 파테르쿨루스 등이 있다.]이나 원로원의 비문 등에서 드러나듯 양부에 대한 효심과 율리우스 가, 클라우디우스 가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다. 역대 로마 황제 중 특이하게도 직전의 두 선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나 [[도미티아누스|훗날 그를 많이 참조한 사람]]과 달리 자신의 권위를 집요하게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티베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의 로마 황제 중 유일하게 '''자신의 신격화를 거부했다.'''[* 7월 율리우스, 8월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팩폭|황제가 12명을 넘어서면 어쩔 건데?]]'''라고 티베리우스가 일갈하자 흐지부지되었다. ~~10월은 [[칼리굴라|가이우스]], 11월은 [[클라우디우스]], 12월은 [[네로]]로 한 뒤 [[로마 내전#s-2.2.1|네 황제가 서로 1월을 먹으려고 경쟁할 뻔 했다 카더라]]~~ ~~[[베스파시아누스]]와 [[5현제]]까지 넣으면 절묘하게 12달 완성이다~~][* 여담이지만 9월과 10월을 이름 바꾸려고 시도한 황제가 후대에 있긴 했었다. '''[[기록말살형]]을 받은 [[도미티아누스]]다.''' 그는 자신의 칭호인 [[게르마니쿠스]]와 자신의 이름인 도미티아누스를 각각 9월과 10월의 이름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15년에 그쳤고 9월, 10월은 도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토가도 그렇고 티베리우스를 그렇게도 참고했으면서 배울 점은 따르지 못했다~~ 사실 그 밖에도 이름을 바꾸려는 황제는 많았다.] 그 밖에도 티베리우스는 등극 후에도 황제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했으며, 나중에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 버리는 치세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 [[원로원]]의 제1시민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역사가들의 악평이 집중되었는데, 당시 식자층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이 아주 좋지 않았던 데다, 평소 검소한 정책을 이어가다 보니 오락거리를 원하던 시민들로부터의 평가도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악평들과는 정반대로, 티베리우스의 이런 정책 덕분에 로마는 탄탄하게 기틀을 잡아갔다.] 이런 악평 덕분에 당대에부터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근대에 들어 티베리우스의 명령서나 속주에서의 행적[* 보통 통화나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문들.]이 재발견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도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그가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이견은 이제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