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르피츠 (문단 편집) ==== 캐테시즘 작전(Operation Catechism) ==== || [[파일:external/www.maritimequest.com/28_tirpitz_nov_12_1944.jpg|width=100%]] || 마침내 1944년 11월 12일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다시 폭격에 나섰고 지난번처럼 기상의 방해도 없어서 주포와 대공포를 쏘며 저항하였으나 3발[* 2발이라는 설도 있다.]의 [[톨보이]] 폭탄이 내려 꽂혔다. 결국 주포 탑 근처 갑판에 톨보이가 명중하면서 티르피츠는 결국 수 분만에 전복하여 함생을 끝마쳤다. 1,900여 명의 승조원 중 함장 베버 대령을 포함한 97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 [[파일:external/www.maritimequest.com/29_wreck_of_tirpitz.jpg|width=100%]] || || 전복된 티르피츠 || 원래 티르피츠도 침몰당하기 직전에는 최악의 경우 침몰하더라도 [[마라(전함)|마라]]의 선례처럼 똑바로 가라앉아서 착저하도록 하면 나중에 재수리하거나 고정 포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일부러 피오르드 지형을 선택하고 어뢰 방지용 그물을 깔았으며, 해저지형도 평탄하고 두꺼운 모래톱을 골랐다. 하지만 '''지반을 갈아엎는'''것을 목표로 탄생한 지진 폭탄 앞에, 저 모든 대비는 의미가 없는 것에 불과했다. 명중한 톨보이 3발을 제외한 나머지 지진 폭탄이 모래톱과 주변의 바닥에 명중하는 바람에 모래톱과 해저 바닥에 큰 구멍을 뚫어놓았으며, 모래톱 전체로 봐도 큰 경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결국 티르피츠는 가라앉으면서 경사면이 된 모래톱과 충돌하여 옆으로 전복되는 바람에 수리 불가 상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다수의 생존한 승조원들은 탈출조차 하지 못했다. 나중에 독일 측이 이들을 구하려고 용접기까지 동원해서 배 밑바닥을 뚫었지만 너무 두꺼워서 마침내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내부의 승조원들은 대부분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였고 비교적 빠르게 구출된 87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격침당하는 당일에 '''[[루프트바페]]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전 도중 랭커스터 폭격기 1대가 격추당했지만 이는 대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톨보이 폭탄을 탑재하고 티르피츠를 끝장냈던 랭커스터 폭격기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방어 무장을 내리고 장갑 일부를 제거한 상태라 [[전투기]]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다만 영국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라 폭격기들의 고도를 450m 아래로 비행한 다음 목적지에 가까이 온 다음 폭격 고도로 상승하게 하였다. 비록 독일 측이 우연한 목격으로 폭격기들의 존재는 알아차렸으나 폭격기들의 목적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후 폭격기들의 목표가 티르피츠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지자, 폭격기들이 도착하기 30분 전에 티르피츠는 다시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번에는 [[JG 5]] 소속 전투기들이 출격하였으나 티르피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 예전 정박지로 날아가는 등 삽질을 하고 있어서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처구니가 없는 게 해군이 티르피츠를 이동시키면서 그 위치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아군인 독일 공군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기밀이라는 구실로 서로 공유하지 않는 모습은 [[일본군|어디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많이 본 양상 아닌가?]] 결국 루프트바페는 티르피츠의 침몰을 방관한 셈이 되었고, 이후 JG 5의 지휘관이자 '''격추수 208기의 에이스'''이자 루프트바페 통산 격추수 10위였던 [[하인리히 에를러]]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 한때 한국에서는 이게 와전되어 그가 티르피츠 격침으로 인하여 처형당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그마저도 불과 한 달만에 1계급 강등당하는 조건으로 출소하였다. 애초에 독일 공군 입장에서는 아무리 티르피츠 격침에 관한 실책이 크다 해도 당장 본토 폭격을 막을 조종사 1명이 모자란 마당에 격추수 208기의 에이스를 처형시켜 없애거나 계속 가둬두는 것은 정말 아무런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하인리히 에를러는 이후 JG 7로 재배치되어 [[Me 262]] 슈발베를 조종했고, 1945년 4월 4일, "'''테오, 여기는 하인리히다. 폭격기 두 대를 격추했는데 탄약이 바닥났다. 들이받겠다. 잘 지내라, [[발할라]]에서 만나자!'''"라는 무전을 남긴 뒤 [[충각]]했고 전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