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로트 (문단 편집) === [[1950년]]~[[1960년대]] === [[한국전쟁]] 이후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들은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장르적 정체성을 형성하며 점점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슷하게 일본에서도 60년대 전후로 '엔카'라는 명칭과 장르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박재홍(가수)|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현인]]의 [[신라의 달밤(가요)|신라의 달밤]] 등 대중들 사이에서 매우 크게 유행했던 트로트가 나온 것도 이 때 즈음. 이 당시도 트로트는 여전히 주류 문화였으며 [[1970년대]] [[포크송]]이 등장하기 전까지 당대 대부분의 명곡을 트로트가 차지했다. 특히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나 굳세어라 금순아 등의 트로트 명곡이 등장하여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1950~1960년대는 이전 반 백년 동안과는 확연히 다른 대한민국의 변화를 겪은 시기인데 이런 부분을 다룬 트로트 또한 많이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박재홍의 [[유정천리]]는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곡으로 만들어 큰 인기를 얻은 노래인데 [[3.15 부정선거]]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대구에서 개사하여 부르며 또 다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사랑과 관련된 내용의 트로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 대표적으로 60년대 중후반 전성기 활동을 한 [[배호]]의 히트곡 [[돌아가는 삼각지]]가 있다. 일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왜색이 다소 남아있어 정부와 시민단체들로부터 '왜색가요'라며 비판을 받던 기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립으로 시작된 일본과의 문화적 단절은 트로트를 왜색가요가 아닌 한국만의 독자적인 특징들로 확립하여 '트로트'라는 하나의 장르로서 발전시키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즈음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트로트와 일본 엔카는 각자 다른 정체성과 특징을 확립하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1950년대는 트로트가 본격적으로 대중화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시기이다. 누군가는 이를 트로트가 서민의 노래가 되고 향유층이 넓어졌으며 양적으로 늘어남과 동시에 다양한 소재를 다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누군가는 이러한 대중화가 상업성을 동반한 양산과 함께 질을 떨어트리게 만들었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것 때문에 왜색이 묻었다고 민족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던 트로트가 한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왜색을 떨쳐내어 대중화 하지 않고 끝까지 그 색을 고집했다면 인기에 나쁜 영향이 있었을 것리다. 해방 이후 대대적으로 왜색을 걷어내는 운동을 통해 트로트 역시 왜색을 지우고 한국적인 정서를 띄게 되었으므로 일부 악의적인 주장처럼 트로트가 일본 [[엔카]]의 열화판이 아닌 한국 음악의 한 장르로서 남아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중화가 이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엔카는 원래 일본에서 활동하던 특정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표출하기 위해 써먹던 정치 선전용 음악이었다. 그래서 '연설하듯이 노래한다'는 뜻으로 연가(演歌, 엔카)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다. 이후 점차 음악적인 면에서 한국 민요와 트로트의 영향을 받기도 하여 정치색은 줄어들었다. 1950년대에는 신민요가 트로트의 주요한 경쟁자였지만 동시에 주한 미8군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재즈 풍이라는 스탠더드 팝이 등장하면서 뽕짝 풍이라고 불리는 트로트와 경쟁했다. 그러나 이 두 장르는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스탠더드 팝의 경우에는 몰락한 뒤 다시 부활하지 못 했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트로트는 다시 부활하는데 성공해서 지금으로 이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