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튜더스 (문단 편집) === 특징 === 컨셉은 록큰롤 스타 같은 군주. 보고 나면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참고로 [[영국]]이 무대이지만, [[영국 드라마]]가 아니다. [[캐나다]]와 [[아일랜드]] 합작. 물론 뒤에 [[BBC]]를 통해 방영되기는 했다.[* 어찌보면 이는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를 다룬 사극을 [[한국]]의 배우들이 출연하여 한국이 제작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인 특이한 점이라고 이전 버전에 쓰여 있었으나, 캐나다와 아일랜드는 영국 왕실과 완전히 남남은 아니다. 일단 캐나다는 영국의 군주가 자국 군주인 [[영연방 왕국]]일 뿐만 아니라 영국계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아일랜드 역시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를 헨리 8세가 겸하고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식민지나 다름없이 대우했고 이 때문에 아래에 후술하듯 친가톨릭 성향을 보이고 있으나, 일단은 자국 역사의 군주이다. 오히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대륙의 국가들이 한중일처럼 남의 역사에 가까우며, 심지어 헨리 8세는 아니지만 해당 국가들도 [[노르만 왕조]]~[[플랜태저넷 왕조]], [[조지 1세]], [[윌리엄 3세]]처럼 자국의 지도자나 제후가 잉글랜드~영국 왕을 겸하기도 했다. 이런 [[동군연합]] 문화는 고립된 구조의 동아시아에서는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거기다 캐나다가 영국계의 후손인 것은 덤이다.] 특이점이라면 그간 헨리의 자식들 중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 공주]]가 가장 주목받았지만 이 드라마는 [[메리 1세|메리 공주]]를 더 주목했다는 점이다. 시즌을 거듭할 수록 인물이 물갈이되면서 오프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드라마를 안 본 사람들도 이 오프닝에 대한 평은 좋은 편.[[http://mid_al2.blog.me/60107348028|#]] 정사신도 눈길을 끌었지만 [[중세]]의 다양한 고문이나 처형 방식에 대한 묘사도 일품(?)이다. 시즌 4에 가서는 [[교수척장분지형|Hanged]], [[거열형|Drawn and Quartered]]도 묘사된다. 물론 지나치게 잔인하다 싶으면 적절히 끊어주는 센스가 있으므로 괜히 [[쏘우]] 같은 영화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즌 1은 사극이 아닌 트렌디 드라마라고 욕을 꽤 먹었는데, 뒤로 갈수록 전통 사극의 맥락에 맞추어간다. 시즌이 계속되면서 인물들의 연기력이나 사극으로의 적응이 되는 것도 볼만한 장면. 특히 시즌 4의 마지막 장면은 웬만한 사극의 마지막회 이상의 감동을 준다. 시즌별로 유명 영화배우가 나온다. 시즌 1에서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 역으로 [[샘 닐]], 시즌 2에서는 [[바오로 3세|교황 바오로 3세]] 역으로 [[피터 오툴]], 시즌 3에서 오토 폰 발트부르크 [[추기경]] 역으로 막스 폰 시도(Max Von Sydow), 시즌 4에서는 [[캐서린 파]] 역으로 졸리 리처드슨(Joley Richardson)이 출연한다. [[헨리 8세]]의 결혼 생활과 거기서 파생되는 갈등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결혼 생활을 다 그릴 수는 없다 보니 왕비들과의 갈등 구조가 굉장히 짧고 드라마틱한 편이다. 그러다 보니 긴 시간대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된 실제 역사도 그러한 갈등 구조에 속도를 맞춰간다. 그래서 실제로는 긴 시간대가 드라마 내에서는 굉장히 압축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좀 어색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에피소드를 연달아 보다보면 [[잉글랜드]]와 [[프랑스]], [[스페인]]이 매화마다 서로를 밥먹듯이 배신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다(...). 사실 관객에게는 불친절할 수 있어도 사극으로서 보자면 오히려 이게 [[고증]]이다. 잉글랜드 대외정책사에 있어서 헨리 8세 치세인 16세기 초반은 종교개혁과 전 유럽의 교파별 분열과 대립, 그 와중 스페인의 범유럽 가톨릭 세력 수장으로서 부상과 반대로 프랑스의 종교, 정치적 난항으로 인한 정치적 카톨릭 이념의 약화,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완의 종교개혁이란 요소로 인해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 삼각관계가 하루가 멀다하고 뒤집어졌다. 그나마 스페인-프랑스 양자 관계야 이탈리아 전쟁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vs 발루아(프랑스) 가문 대립 때문에 3차 이탈리아 전쟁과 캉브레 동맹 전쟁 이후 확실한 라이벌 관계에 들어갔지만, 잉글랜드는 여전히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전통적으로 프랑스를 견제할 대륙 열강으로 스페인과 동맹을 맺냐, 아님 종교 및 이념적 논리에 따라 스페인을 적대할 것이냐, 그렇다면 지금까지 대불관계는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기존 잉글랜드 외교사의 경험이 통하지 않던 엄청난 과도기적 시대였다. 그나마 헨리 8세 이후 즉위했다가 단명한 아들 [[에드워드 6세]], 훗날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을 거치고 스페인과 무적함대라는 거한 무력충돌도 겪으며, 잉글랜드는 전통적인 적이었던 프랑스보다 새로운 신흥 적인 스페인을 더 적대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확실하게 잡았다. 그러나 헨리 8세 시절엔 애초에 잉글랜드 종교 개혁도 수장령만 내렸을 뿐이였다. 더군다나 이때만 하더라도 결과론적으로 이루어진 수준의 영구적이고도 근본적인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은 잉글랜드에서 거의 영향력이나 입지가 없었던 극소수의 루터, 칼뱅 유럽 대륙식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본격적 신학적 개신교도들을 제외하곤 헨리 8세 본인 포함해 누구도 상상못한 결과였다. 뒤집어 말하면 헨리 8세 시절 땐 당장 잉글랜드의 주적도 전통적인 프랑스인지 스페인을 새로 적으로 설정해햐 할지, 잉글랜드의 나머지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은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스페인 측에서 어느정도 묵인하고 여전히 외교적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인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만큼 근본적인 차이였는지, 문자 그대로 모든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시점이다. 근세 유럽의 종교 분열기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스페인 vs 종파는 좀 별나도 엘리자베스 시절쯤 되면 확고히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국제 개신교 세력의 메이저 중 하나로 등극한 잉글랜드 vs 가톨릭도 중요하지만 만만치 않은 [[위그노]] 세력간에 갈팡질팡하다 결국엔 아예 근대 세속주의적 정치논리의 토대를 깔아버린 후기 발루아-초기 부르봉 프랑스간의 삼자 대립은 오히려 헨리 8세 치세가 거의 끝날무렵 프랑스에선 내전이 펑펑 터지고, 잉글랜드 국교회는 이미 개신교적 정체성을 굳혔고, 반대로 스페인의 가톨릭 교조화는 [[펠리페 2세]] 치세를 겪으며 한층 강화되면서 이르게 잡아도 잉글랜드 기준에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의 [[메리 1세|메리]] [[메리 1세(스코틀랜드)|여왕]] 사후에 들어서는 체제이다. 헨리 8세 시절의 잉글랜드 대외정책은 전형적인 과도기에다가 외부적으론 종교 개혁과 분열로 인한 유럽의 정치적 대립이 본격적인 근대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형태를 띄기 전, 여전히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는 범유럽 기득권 내의 이권충돌 성격이 강해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다양하고도 정신없는 동맹과 통수, 원수 관계를 낳았던 이탈리아 전쟁과 맞물려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삼국의 외교관계가 하루가 멀다고 휙휙 바뀌던 시절이 맞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느끼는 시간대는 굉장히 짧아 보이기 때문에 [[헨리 8세]]와 그 주변인들은 엄청난 [[동안]]으로 나온다. 제작진도 뭔가 이상하겠다 싶었는지 마지막화 바로 이전 에피소드에서 주요 인물들의 분장을 확 바꿔 버린다. 특히 왕이 급노화해서 골골거린다.[* 4기 처음부터 [[헨리 8세]]의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해지고 목소리가 약간 걸걸해지긴 하는데 이것도 장면마다 조금씩 달라서 노인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실제 역사상 [[캐서린 파]]와의 결혼 기간이 4년 정도였기 때문에 역사를 생각하면서 보면 아주 짧은 기간 내 팍 삭은 것이다.] 늘 그렇듯 자잘한 고증오류들이 존재하지만 개중에서도 문제가 있다면 너무 스캔들에만 집착하다보니 헨리가 왕비 갈아치우는게 여자후리고 다니려는 목적 때문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는 사실이 아니며 헨리 8세는 20대 후반부터 자신보다 6세 연상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여러번의 사산 내지 유산을 반복하면서 더 이상 후계자를 낳기 어렵다는 게 확실해지자, 그 때부터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는 공식적인 관계만 유지하며 이혼을 시도했다. 특히나 애첩에게서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를 얻게되자 [[토머스 울지]]를 닥달하여 이혼 시도를 했다. 그러니 드라마처럼 [[앤 불린]]에 홀딱 반해서 사이좋던 조강지처를 버린 게 아니라는 것. 게다가 [[헨리 8세]]가 이혼을 처음 시도했을 때는 드라마처럼 [[앤 불린]]을 만나고 난 뒤가 아니라 앤 불린이 어릴 때부터였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했던 이유는 여색질에 미쳐서가 아니라 '''적법한 남자 계승자'''를 얻어서 왕국을 튼튼하게 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당시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녀였던 [[메리 1세|메리 공주]]는 당대의 풍습에 따라 헨리의 [[마거릿 튜더|누나]](스코틀랜드)나 [[메리 튜더|여동생]](프랑스)처럼 다른 [[유럽]] 왕실에 시집을 보내야했는데, 이는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 왕실로 넘어가는 거였고 이런 상황을 [[영국]]의 신하들도 매우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때문에 헨리 8세의 이혼 시도는 왕이 새장가를 가서 든든한 후계자를 보는 것에 좀 협조해주자는 의견이 영국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헨리 8세가 아들을 낳는 것에 집착하고 아내들을 닥달하는 모습은 드라마 내에서도 어느정도 묘사된다. 그리고 의외라면 드라마가 기존 [[먼나라 이웃나라|대중역사서]]나 [[울프 홀|소설]]에서 반복하던 휘그 사관의 오류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20세기 중반 이후의 현대 영국사학계 견해를 적극적으로 극에 반영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먼나라 이웃나라 등 대중역사서에 익숙한 시청자는 본작이 '친가톨릭적 드라마'라 오해할 수 있는데, 이는 휘그 사관의[* 휘그 사관은 18-19세기는 물론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사 해석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역사관으로, 영국의 역사를 ㄱ. 입헌군주제 ㄴ. 의회민주주의 ㄷ.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발걸음으로 해석하는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관이다. 휘그 사관은 여기서 이 '목적'을 위한 엔진으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를 꼽는다. 이러한 목적론적 역사관에 사실을 끼워맞추다보니 동시대의 두 여왕 자매가 거울에 비친 듯한 종교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는 "영국사의 흐름을 거스른 일탈 내지는 반동"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휘그 사관에 부합하는 모범적 왕"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휘그 사관은 엄청난 반박들에 부딪혔으며, 학계 다수설의 위치를 상실하였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휘그 사관'이라는 말이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역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휘그 사관이 역사학적으로 그릇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문학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소설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와 [[먼나라 이웃나라|아동용 만화책]] 등에서는 여전히 즐겨 쓰인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문학적 내러티브는 깔끔하고 재미있으며 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현대적 역사 서술에서는 피해야 할 태도이다. 사학자 Eamon Duffy가 괜히 학술서적도 아니고 대중서적인 《[[울프 홀]]》을 자기 학술서에서 직접 언급하며 비판한 게 아니다.] 오류가 정정되면서 생긴 차이이다. 물론 역사학계는 인물 개개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가급적 지양하므로,[* 사실 이것도 '아예 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령 초기 근대 종교개혁사의 거장인 역사학자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Marshall_(historian)|피터 마셜(Peter Marshall)]]이 그의 저서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070?_s=instant&_q=%EC%A2%85%EA%B5%90%EA%B0%9C%ED%98%81&_rdt_sid=search_instant&_rdt_idx=4&_rdt_arg=%EC%A2%85%EA%B5%90%EA%B0%9C%ED%98%81|「종교개혁」]] ([[https://www.amazon.com/Reformation-Very-Short-Introduction-Introductions-ebook/dp/B003E1BGLE/ref=sr_1_1?crid=25MAXI9IQVGHJ&keywords=the+Reformation+very+short&qid=1656374014&s=digital-text&sprefix=the+reformation+very+short%2Cdigital-text%2C256&sr=1-1|the Reform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에서 헨리 8세에 대해 한 평가를 들 수 있다: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종교 정책을 추진한 가장 노골적인 사례는 1530년대 초에 결혼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황의 권위에 반대할 이유를 찾아낸 헨리 8세이리라. 그러나 이런 헨리조차 자신이 신의 뜻에 부합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Marshall_(historian)|피터 마셜(Peter Marshall)]].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070?_s=instant&_q=%EC%A2%85%EA%B5%90%EA%B0%9C%ED%98%81&_rdt_sid=search_instant&_rdt_idx=4&_rdt_arg=%EC%A2%85%EA%B5%90%EA%B0%9C%ED%98%81|「종교개혁」]])] 극중의 캐릭터 해석은 '전적으로 역사학적인 평가'가 아니라 '드라마의 해석이 섞인 평가'이다. 그러나 이게 본작이 '반개신교'[* 애당초 헨리 8세의 종교 정책에 대한 시니컬한 평가를 '반개신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헨리 8세는 개신교라기보다는 '교황 없는 가톨릭'을 원한 거에 가까웠는데, 그의 종교 정책에 대한 냉소적 평가가 왜 반개신교이겠는가.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의 교의적(전례적X) 정체성은 개신교였지만, 이들 역시도 비국교회 개신교에는 적대적이었고 탄압적이었다. "The regimes of Henry VIII, Edward VI, Elizabeth and James I all put Protestants to death as well, for beliefs that were more radical than those permitted by the established Church of the time. In addition, Elizabeth executed almost 200 Catholics, in theory for treason but actually just for attempting to practise their religion. The executions that followed the rebellion of the northern earls add another couple of hundred to that figure."{{{[}}}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모두 비국교회 개신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당대 국교회가 허용하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이유로.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2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론상으론 반역죄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가톨릭 신심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별개로 북부 백작들의 반란에 이어 일어난 처형 건수 수백명이 있다. ([[https://www.amazon.com/Brief-History-Britain-1485-1660-Dynasties-ebook/dp/B0056A8UU6/ref=tmm_kin_swatch_0?_encoding=UTF8&qid=&sr=|《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https://en.wikipedia.org/wiki/Ronald_Hutton|Ronald Hutton]])] 혹은 '친가톨릭' 드라마라는 소리라는 건 말도 안되는 오해이다. 예컨대, 오늘날 임진왜란을 다루는 사극이 선조를 '암군'이 아니라 '똑똑한 소인배'로 묘사했다면, 구체적인 캐릭터 묘사에선 당연히 극의 해석이 들어가지만, 기존의 통념보다는 역사학적 시선에 더 다가선 것이다.[* 헨리와 에드워드의 정책이 많은 반발을 불렀다는 것은 학계 시선에 부합한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개혁적인 성향을 띄던 사람들도 대다수는 [[토머스 모어]]와 [[에라스뮈스]]의 노선이었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단절을 주장했던 것이 아니다.(Duffy, 2017) '젠트리의 열광적 지지' 같은 것도 전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헨리 8세]]로부터 [[수도원]] 자산을 매각한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헨리 8세의 종교정책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잉글랜드 교회가 완전히 [[개신교]]로 자리잡은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치세 막바지나 되어서야 가능했고, 그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충돌이 있었다. 이러한 가톨릭 교도의 반발은 역사학자 Ronald Hutton 교수의 말대로 이는 당시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유럽에서 가장 덜 부패한 교회'였으며 가톨릭에 대한 대중들의 충성도도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수의 백성들은 [[수도원]] 폐쇄와 여러 대중신심 행위를 폐지당한 것에 대한 여파를 날카롭게 느끼고 있었고, 시즌 3에서 비중있게 묘사된 헨리 8세 시기의 '은총의 순례' 반란과 엘리자베스 1세 시기의 '북부 지방 봉기'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반발을 일으켰다.(Cunich, 2009) 오히려 메리의 종교 정책은 가장 인기가 좋았다. "The total import of the evidence of both rebellion and will-making is that Mary's Catholicism attracted more spontaneous support from the English than Edwardian Protestantism or that of the early reign of Elizabeth."{{{[}}}전체적인 반란과 유언서들의 증거들을 종합해볼때 '''메리의 가톨릭 신앙은 에드워드의 개신교 신앙이나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의 그것보다 더욱 자발적인 지원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 ([[https://www.amazon.com/Brief-History-Britain-1485-1660-Dynasties-ebook/dp/B0056A8UU6/ref=tmm_kin_swatch_0?_encoding=UTF8&qid=&sr=|《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유언장을 조사한 이유가 의아할 수 있는데, 튜더 시대 잉글랜드는 소수의 열렬한 특정 교단 신자들과 대다수의 방관자들로 구성되어있기에 정확한 종교 통계를 위해선 당대인들이 남긴 유언장에 어떤 신심이 들어가있는지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엘리자베스 치세를 초기로 한정한 이유는 에드워드(6년)나 메리(5년)에 비해 훨씬 오래 재위(45년)하였기 때문이다.] 애당초 튜더스는 무슨 종교방송 드라마가 아니라, 애로씬이 난무하는 21세기 영어권 상업드라마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아도 [[막장드라마]]로 분류될만큼 파격적인 전개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 역사를 크게 왜곡한 건 별로 없다. 오히려 등장인물의 대사 등등에서 문헌 고증에 매우 충실한 장면들이 넘쳐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