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군 (문단 편집) === 냉전 === 냉전 시기에는 나토 동부의 '''핵심 [[군사력]]'''을 맡아 소련을 견제하는 최선봉이었다.[* 나토 국가 중 소련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나라는 노르웨이와 튀르키예뿐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소련 국경은 그 길이도 짧고 북극권 안쪽에 있어서 전면전에 돌입하기도 힘든 환경이라 전면전의 위험이 낮았기 때문에 사실상 나토와 소련의 유일한 접경지는 소련-튀르키예 국경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친미로 기울면서 소련의 가상적국이 된다. 유사시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하여 러시아의 흑해 함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위치였다. 사실 [[쿠바 미사일 위기]]때도 소련은 튀르키예에 설치한 미군의 미사일 기지의 철수를 합의조건으로 삼기도 했다.[* 미국은 튀르키예의 기지를 철수하긴 했지만, 대신 [[지중해]]에 [[SLBM]]을 실은 [[원자력 잠수함|전략원잠]]을 배치하는 걸로 튀르키예를 달랬다.] 튀르키예군은 [[6.25 전쟁]]에 전투 병력을 파병했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형제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파병의 배경에는 소련의 위협이 있었다. 당대 소련은 튀르키예에 있어 최대의 위협이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에 가입을 희망했다. 그러나 초기 회원국들은 전부 기독교(천주교/개신교) 문화권이었던 만큼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의 가입을 거부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참전이 결정되었고, 튀르키예는 파병을 대가로 1952년 나토 회원국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튀르키예군은 참전 유엔군 중에서도 용맹을 떨쳤고,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중국군]]을 물리친 [[금양장리 전투]]는 튀르키예군의 대표적인 전과중 하나이다. 그리고 전쟁 가운데서도 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을 볼보기도 했다. 참고로 이때 파병된 튀르키예군의 상당수는 [[쿠르드족]]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영식,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69&yy=2015#axzz3Wc091f16|[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2>쿠르드 참전용사들과의 인터뷰"]], 매일신문] 많은 쿠르드족들이 참전한 이유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전쟁당시 튀르키예군은 파병군을 확충하기 위해 직업군인 중 희망자와 복무중인 현역장병 가운데 복무기간을 1년 단축하고 추가로 위험수당 및 파견수당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각 부대마다 희망자를 뽑아 한국으로 보냈다. 이때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인 중부와 동부지역의 병사들이 제대해도 딱히 일은 없고, 군대에서 한 몫 잡자는 심정으로 많이 지원했고 실제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 대부분의 고향은 중부지방과 남동부지방이다. 그리고 남동부지방 인구의 상당수가 쿠르드인이다. 하지만 전사자 대부분의 출신지가 튀르키예인의 인구비율이 월등히 높은 서부지방이며 관련해외자료 또한 희박하기에 진위여부에 문제가 있다.[* 튀르키예군 전사자 명단, [[https://www.koresavasiveizleri.com/sehitlerimiz/]]] 일각에서는 튀르키예군이 한국전쟁에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jsessionid=A0A80A4EDD8D3DB73ACD38F9A8E72D6C?bbsId=D110&searchKey=&resultCode=200&sortKey=regDate&searchValue=&articleId=937621&TOKEN=44c8e6135a6d32a8f1ef861fcc59c0&pageIndex=1|엄청난 대민범죄를 저질렀다]]--[*A 삭제됨]고 이야기 한다. 해당 포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best&No=111564&cpage=|#]][[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8285&page=0|#]][[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total&no=3361728|#]][[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2089|#]][[http://www.slrclub.com/bbs/vx2.php?id=free&no=36189975|#]] 해당 게시물만 믿고 튀르키예를 무작정 비난했지만 '''얼토당토 하지 않은 괴담이고 역사왜곡이다.'''[[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2201478|#]][[http://larca.egloos.com/3764571|#]] 해당 글의 출처는 아고라에서 나온 것이 전부이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 자료들도 전무하다. 그리고 해당 게시글에 따르면 한국전쟁 참전국은 24개국이 아니라 16개국이다. 기본적인 상식도 없이 작성된 소설인 것이다. [[1974년]] 그리스 군부가 [[키프로스]]를 그리스에 합병하고자 군대를 파병하면서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 주민과 충돌하여 벌어진 [[키프로스 전쟁]]에서 키프로스 섬 북부를 점령하고 괴뢰정권([[북키프로스|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세운 역사가 있다. 이는 유엔 안보리에서 규탄되었으나, 아직도 튀르키예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면서 괴뢰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소련과 국경을 맞대는 [[최전방]]으로써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때 튀르키예는 [[M48]] 전차 '''3,008대'''와 [[M47]] 전차 1,000대, [[M113]] 장갑차 3,000여대를 운용하는 육군 대국이었다. 당시 한국군보다 월등히 우수한 전투력을 지녔으며 공군력의 경우에도 [[F-102]] 요격기 50여대와 다수의 [[F-104]] 요격기와 [[F-5]] 전투기 200여대, 그리고 1974년 한국군보다 한 발 앞서서 [[F-4]] 전폭기 중 최신형 F-4E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군보다 양과 질에서 우수했던 군대였지만 대부분이 '''미국과 [[서방]]의 전폭적인 원조에 의존했던 상황이었다.''' 결국 한국이 자체적으로 튼튼한 산업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시작해 고도의 경제성장을 누리는 동안 튀르키예의 [[군사정권]]은 낙후된 산업구조와 부패한 정치체계를 개선할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군사력의 차이도 뒤집어지게 된다.[* [[케난 에브렌]]이 튀르키예 경제를 다시 정상궤도에 올려놓긴 했지만 부실한 경제와 높은 실업률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