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툴루즈 (문단 편집) === 서고트 왕국 ~ 알비 십자군 === 로마제국의 쇠퇴 후로 툴루즈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507년의 부이에 전투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골족계 로마인과 서고트인들이 동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동쪽의 셉티메니아 대공국과 남쪽의 서고트 왕국을 스스로 견제해야할 필요를 느꼈고, 629년에 툴루즈 왕국(Royaume de Toulouse)을 세웠다가 얼마 안있어 프랑크 왕국 휘하 대공령(Grand-duché)으로 들어가며 7세기와 8세기까지 [[피레네 산맥]]에서 루아르(Loire), 호데(Rodez)에서 [[지중해]]까지 뻗어지는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72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북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우마이야 왕조]]와 프랑크 왕국이 격돌한 툴루즈 전투[* 결과는 우마이야 왕조의 북진 저지 성공]가 벌어지고 나서는, [[중세]]에 들어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툴루즈 백국]]이 만들어지며 그것의 수도가 되었다. 1096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생 세르낭 성당의 축성을 위해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152년에는 현재의 시청 및 시의회 역할을 하는 꺄피툴라(Capitoulat)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현재 툴루즈 시내의 꺄피톨(Capitole)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다.1189년의 도시 반란 이후 금전적 부족과 외부의 위협때문에 백작령의 힘은 대폭 축소되었으며, 꺄피톨라는 현재의 시청 자리에 자신들의 첫번째 건물을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인 1209년에 툴루즈가 속한 [[옥시타니|랑그독]]지방에서 [[카타리파]]가 힘을 얻자[* 2년 전이었던 1207년엔 툴루즈의 백작 레몽 6세가 [[파문]]당하기도 했다. 1208년에 레몽 6세는 교황특사인 피에르 드 카스텔뇌를 만났으나, 격렬한 논쟁끝에 그를 살해하였고 교황은 이를 빌미로 랑그독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토벌을 명령했다. 하지만 사실 본래 목적은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한 것이었고,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국]]과 [[교황청]]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때 있던 좋은 빌미였을 뿐이다.], [[교황청]]은 카타리파를 믿는 [[옥시타니|랑그독]]지방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토벌을 명령하며 [[카타리파#s-2.2|알비 십자군]]을 일으킨다. 툴루즈는 십자군 초기에 레몽 6세가 카타리파 토벌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꿔 베지에와 [[카르카손]]이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괜찮을수 있었지만, 1211년에 레몽 6세가 다시 파문당하며 십자군은 툴루즈로 향했고, 공성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자 그는 아들인 레몽 7세와 함께 도주했다. 이들은 지역 도시들의 반란을 주도하며 십자군과 대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십자군의 사령관 몽포트가 전사하고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함에 따라 십자군은 일단 랑그독 지방에서 물러난다. [* 이를 레몽의 반란 이라고 한다.] 1222년에 레몽 6세가 사망하자 툴루즈의 백작자리는 그의 아들인 레몽 7세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또한 아버지처럼 3년 후 파문당한다. 당시 [[프랑스 왕국]]의 왕이었던 [[루이 8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남하하며 수많은 도시들을 항복시켰고, 공성전 끝에 끝내 [[아비뇽]]까지 점령하였지만 1226년 사망한다. 뒤이어 즉위한 나이어린 [[루이 9세]]의 섭정인 블랑카 데 카스티야[* 루이 8세의 부인이다.]는 레몽 7세의 외동딸과 루이 9세의 남동생을 결혼시켜 이 둘의 자손에게 툴루즈 백작을 계승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결국 1229년에 프랑스 북부의 모(Meaux)에서 만나 협정을 체결했다. 이 때 그가 프랑스 왕실에 잡혀 고문당하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레몽 7세는 이후로도 툴루즈 백작령을 되찾기 위해 애썼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작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불사하면서까지 자식을 갖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249년에 사망해 툴루즈는 루이 8세의 8남 알폰소에게 귀속된다. 이후 알폰소와 잔느 역시 1271년 8차 십자군 도중에 자식없이 사망함으로써 툴루즈 백작령은 프랑스 왕실영토에 흡수되었다.[[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939643741|#]] 같은해에는 툴루즈 대학(Université de Toulouse)이 최초로 설립되어 교육 중심지로써 가동하기 시작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