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신라 (문단 편집) == 유교 문화의 확산 == 이미 통일 이전부터 유교는 [[화랑]] 문화와 접목되어, [[삼국통일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여 신라군을 강군으로 단결시켰다. 더 이상 전쟁이 없어진 통일신라에 이르러 제31대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하고,[* 이는 제28대 [[진덕여왕]] 시절부터 추진하던 문제였으나 전쟁 와중에 미뤄져 결국 제31대 신문왕 시대에 설치한 것이다.] 거기서 [[오경]]을 가르쳤으며, 제38대 열조 원성왕때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내성에서는 대부전(大傅典)이란 전담 관청을 설치해 왕실 자녀에게 유교적 [[제왕학]]을 가르쳤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s-2.4]]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s-2.4]] 문서 참조. 지방 교육기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토산군]]의 [[최응]], 광해주([[춘천시]])의 [[박유]], [[영암군]]의 [[최지몽]] 등 지방 출신 지식인이 증가하고, 5대 [[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청주시]])에는 학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하대는 이렇게 유교적 교육이 전국에 보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