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톤네루즈 (문단 편집) == 활동 이력 == 이시바시와 키나시 양쪽 모두 [[도쿄]] 토박이로 도쿄의 명문 고등학교인 테이쿄 고등학교(帝京高等学校)에 재학 중이었다. 재학 당시 이시바시는 야구부, 키나시는 축구부에서 클럽 활동을 하고 있었다.[* 테이쿄 고교는 스포츠 명문 학교로도 유명해서 테이쿄 출신의 프로 야구 선수, 축구 선수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본래 [[야구]]와 [[축구]]라는 스포츠가 팀 플레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팀원들간의 단합을 강조하는데다 스포츠 클럽의 구성원들은 체력도 뛰어나고 외향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부에서 독보적인 분위기 메이커로 유명했다고 한다. (주로 선배나 선생님의 흉내 혹은 성대모사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반은 아니였지만 당시 테이쿄 고교의 야구부와 축구부가 운동장을 공유하는 탓에 교류가 빈번했기에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이시바시의 경우 고교생 신분으로 아마추어 개그 대회에 빈번하게 출전하고 있었고 키나시도 [[와다 아키코]](和田アキ子)의 성대모사 등으로 틈틈히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는 등 두 사람 모두 개그맨을 꿈꾸긴 했지만 콤비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테이쿄 고교 졸업 후 이시바시는 [[호텔]] 센츄리 하야트에 취직, 호텔리어가 되었고 키나시는 대기업 [[다이하츠]] 공업에 입사해 셀러리맨이 되었다. 사회인이 된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이시바시는 <오와라이 스타 탄생!!>[* 닛테레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의 자매프로그램.]에 참가하고자 평소 가장 재미있던 동창생이라고 생각했던 키나시에게 콤비 결성을 제의했고 키나시가 동의하여 톤네루즈가 결성되었다. 결성 초기에는 각자의 이름을 줄인 타카 & 노리 등으로 활동했는데 주로 [[안토니오 이노키]]의 성대모사,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당시 인기 아이돌의 흉내 등 전형적인 일발 개그나 [[만자이|일본식 만담]]을 선보였다.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자 프로 개그맨이 될 것을 결심한 두 사람은 각기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1980년]] 정식으로 콤비를 결성, 프로 개그맨이 되었다. 프로 개그맨으로의 전향에 대해 의견을 나눌때 당시 이사비시가 키나시와 찻집에서 만나서 심각한 표정으로 '키나시군, 나 프로가 되고 싶은데 같이 할 생각 없어? 어때?'라고 물었는데 키나시가 곧바로 무뚝뚝하게 "좋아"라고 한마디로 승낙했다고 한다. 프로 데뷔 초 [[닛폰 테레비]](日本テレビ)의 프로듀서였던 이하라 다카타다(井原高忠)의 제안으로 지금의 콤비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하라는 멤버 둘의 영문 이니셜 T와 N이 들어가는 콤비명 2가지를 생각해 놓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톤마와 노로마'[* とんまとのろま, '멍청이와 바보' 정도의 의미.], 나머지가 지금의 톤네루즈였다고 한다. 장기간 차세대 스타로써 인기를 끌라는 의미와 둘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어두운 녀석들이구나'라고 느꼈던 이미지를 담아 톤네루즈라는 콤비명을 만들었다고 한다. 톤네루즈는 프로 데뷔 후 2년만인 [[1982년]] [[4월 10일]] <오와라이 스타 탄생!!>이라는 개그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일본 개그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당시 다른 심사위원들은 이들의 개그에 악평을 했지만 [[아카츠카 후지오]]와 [[타모리]]가 이들을 적극 지지하여 그랑프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타모리를 '동경'하고 있었던 톤네루즈는 이 때부터는 아예 타모리를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부터 톤네루즈는 '올 나잇 후지([[1984년]] ~ [[1989년]])'[* 톤네루즈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방송으로 이 프로그램을 통해 톤네루즈는 젊음의 애너지가 넘치는 강렬한 개그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냥코클럽|유야케 냥냥]]([[1985년]] ~ [[1987년]])', 라디오 방송 '톤네루즈의 [[올 나이트 닛폰]]([[1985년]] ~ [[1992년]])'[* 주로 톤네루즈의 토크로 이루어진 라디오 방송으로 그들이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촬영 뒷얘기, 연예인 업계 관계자 이야기, 두 사람의 테이쿄 고교 시절 얘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토크가 달아오를 때는 청취자들이 보내온 엽서를 전혀 읽지 않고 프로그램이 끝나기도 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방송에 쓰이면 NG라는 암묵의 룰이 있었던 일반 대중들의 은어를 방송에 적극 도입하는 면모도 주목받았다.][* 그전까지 청취율 1위 방송이었던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을 제치고 청취율 1위를 달성하는 인기를 누렸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톤네루즈의 올 나이트 닛폰은 화요일에 편성되었고 수요일에 편성된 [[코이즈미 쿄코]]의 올 나이트 닛폰과 청취율 1위 경쟁을 하였다. 목요일에 편성된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은 당시 두 방송 다음가는 인기를 누렸다.] 등의 방송에 출연하며 사회 현상에 가까울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방영한 [[미팅#s-3|맞선 파티]] 프로그램인 '네루톤 붉은고래단'(ねるとん紅鯨団) 역시 화제가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한동안 일본에서는 미팅을 '네루톤 파티'라 부르기도 했다. [[1988년]] 후지 TV 정규 방송으로 편성된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 1988년부터 30년 동안 방송을 이어간 레전드 방송. [[코이즈미 쿄코]], [[쿠도 시즈카]], [[나카야마 미호]] 등등 당대의 유명 아이돌이 자신들의 전성기에 열심히 출연해서 얼굴을 보였던 초 인기 방송이었다.]가 방영을 시작하면서 톤네루즈의 이러한 엄청난 인기는 정점을 찍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갑자기 세트에 매달리거나 카메라를 밀어서 넘어뜨리고 코너 진행 도중 스탭들을 방송에 직접 노출시키는 등 막가파식 개그 스타일과 [[오냥코클럽]] 등의 여자 연예인에게 [[성희롱]] 수준인 [[섹드립]]을 하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나이를 먹은 지금은 유순해진 편.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나이를 먹으니깐 섹드립치기 힘들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라이벌인 [[마츠모토 히토시]]도 같은 발언을 한적이 있다.] 톤네루즈의 전성기 당시 일본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가 한창인 시절인데다가 일본 예능계 전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성희롱]]이 넘쳐나던 것[* 당시 일본 방송계는 인기 게닌이었던 [[시마다 신스케]]가 "성희롱이 뭔지 의미를 모르겠어. 버라이어티에 출연한 신인 여성 아이돌이 긴장했을 때 가슴을 주물러주면 긴장이 풀리잖아 그게 뭐가 나빠?"라는 말을 할 정도로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다.]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톤네루즈는 [[성희롱]]에 가까운 [[섹드립]]으로 인기를 끌었다. 톤네루즈의 방송에 출연했던 여자 연예인은 대부분 당했다고 보면 된다. 이후 브레이크하여 대단한 위상을 누리게 되는 [[마츠시마 나나코]]도, 드라마의 히트로 대스타가 되기 전에는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의 콩트 코너에 레귤러로 출연하여 꽤 굴욕적인 활동을 해가며 얼굴을 알려야 했던 과거가 있다. 이때 맡았던 역할이라는 것이, 톤네루즈 콤비 이시바시 타카아키, 키나시 노리타케와 3인조를 이루어 이시바시와 키나시에게 구타당하면서 마치 [[AV 여배우]]가 할 법한 야한 대사를 연달아 말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그때 나나코의 대사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옮기기도 어렵다. ([[AV 여배우]]의 대사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된다.)[[https://www.nicovideo.jp/watch/sm7797801|당시 영상.]] 실제로 [[1992년]] [[11월 4일]],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에서 준 레귤러로 출연했던 56세의 중년 연예인 이나무라 사치코가 이시바시 타카아키와 프로그램의 치프 프로듀서 이시다 히로시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소송을 건 일도 있었다. 사치코는 [[1992년]] [[10월 29일]]자 방송에서 [[비키니]]를 입은 자신에게 이시바시 타카아키가 성희롱을 한 것과 본인은 10년 넘게 연예계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일반인 아줌마여서 머리 손질을 안했습니다."라고 자막을 단 일에 대해 이시바시 타카아키와 이시다 히로시에게 200만엔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서 프로그램 내에서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한 코너를 띠로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이시다 히로시는 이에 "방송에 출연한 경험이 없다고 표현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사과했고, 톤네루즈의 소속사는 "이시바시 본인과 연락이 되지 않아 코멘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변을 피했다. 결국 소송은 합의하에 마무리 되었다. 이러한 소동이 끝난 후에도 프로그램의 [[음담패설]] 수위는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이들은 코미디 가수로도 상당히 유명하다. 두 사람은 [[1984년]] [[12월 5일]], 싱글 <一気!>를 내어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89년]] [[11월 7일]]에는 [[도쿄 돔]]에서 콘서트를 성황리에 개최했을 정도로 개그맨 가수로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멤버인 키나시 노리타케는 [[엔카]] 가수와 협업하여 오리콘 엔카 차트에서 1위를 하기도 했다. (오리콘 차트 최고 순위는 25위.) 이들의 곡들 중 가장 유명한 곡은 [[1992년]] [[4월]]에 발표한 18번째 싱글인 <방울뱀이 온다!(ガラガラヘビがやってくる!)>라는 곡으로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박사]]가 리메이크하였고 1993년에 개봉한 홍콩 영화인 [[시티 헌터(1992년 영화)|성룡의 시티헌터]]의 OST로도 번안하여 쓰이기도 하였다.[* 선상 파티 장면에서 나오며 이 노래를 부른 연경천사(軟硬天師)라는 그룹은 홍콩의 유명 코미디언인 갈민휘(葛民輝)와 임해봉(林海峰)의 2인조로 구성되었다.] 여담으로 이 노래의 작사자는 다름아닌 [[AKB48]]의 수장인 [[아키모토 야스시]].[* 이와 관련해서 2014년 6월 1일에 방송된 퀴즈 30 단결하라!의 33회인 AKB48 단결 스페셜에서도 이 문제의 제목을 맞추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멤버 전원이 세대차가 너무 많이 나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키모토 야스시는 톤네루즈와 여러 방송에서 함께 일했으며 톤네루즈가 부른 곡들 대다수를 작사했다. 사적으로도 톤네루즈 멤버들과 무척 친하다고 한다. 톤네루즈는 개그맨 활동 외에도 가수, 배우, 광고 모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며[* 이 때문에 오와라이 팬들은 "톤네루즈는 멀티 엔터테이너지 게닌이 아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특유의 마초적인 카리스마와 장난기 가득한 청년이라는 양면적인 이미지로 유명 [[아이돌]]에 필적하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광대처럼 인식되던 일본 내 개그맨의 이미지를 멋있는, 동경하는 연예인으로 바꾸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실제로 톤네루즈는 일본 최초로 개인 코디네이터를 고용한 개그맨이라고 한다.[* 이시바시는 182cm, 키나시는 178cm로 평균 일본 남성의 신장보다 장신인지라, 다른 남자 연예인들과 함께 있으면 상당한 거구로 보이는 특징도 있다. 이 때문에 몇몇 남자 배우들은 톤네루즈와 서서하는 방송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남자 청소년들에게 "롤모델인 연예인"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하자 자신들은 [[고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잡일을 처리해주는 스탭들 중에서 [[도쿄대]] 출신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고교 중퇴의 로큰롤 가수로 어필하던 인기 가수 [[오자키 유타카]]와 함께 80년대 당시 일본내에서 만연했던 [[학벌|학벌주의]]를 타파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더 베스트 텐]]에 같이 출연한 [[코이즈미 쿄코]]가 톤네루즈에게 "나는 중졸(정확히는 고교 중퇴)"이라고 말하자 톤네루즈가 아무 대답도 안하고 침묵을 하는 바람에 진행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중졸도 훌륭한 사람은 많이 있으니까 거들먹거리지 말아라!"라고 톤네루즈를 질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톤네루즈는 [[만자이|만담]] 개그에서만 통용되던 콤비 형식을 [[예능 프로그램]]에 도입하고,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친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파트너와 사이가 좋으면 못 웃긴다'는 불문율을 깨뜨렸다.[* 일본에서는 '파트너와 사이가 좋으면 못 웃긴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개그맨들이 방송에서 사이 나쁜 모습을 보여주거나 서로를 험담하는 개그가 상당히 많다. 베테랑이 될수록 파트너와 함께 다니는 일도 없어질 정도. 특히 [[다운타운]], [[웃짱닌짱]] 등의 요시모토, 칸사이 계열이 그런 경향이 커서 대기실도 따로 쓰고, 녹화할 때 아니면 운 좋게 화장실에서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면 하루종일 볼 일이 없는 경우도 있다 할 정도.][* 반대로 경력이 오래되었음에도 멤버간 사이가 좋은 걸로 유명한 게닌들은 [[폭소문제]], [[사마~즈]], [[넵튠(오와라이)|넵튠]] 등인데 이들은 모두 칸토 개그맨들이다.] 이처럼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톤네루즈는 [[1994년]]에 소속사 '오피스 A to Z'에서 나와서 자신들의 전용 소속사 '어라이벌' 사무소를 차렸다. 전용 소속사를 차린 이후로는 콤비로서의 활동을 줄이는 대신 각자 개인 활동의 비중을 높여나갔으며 2000년대까지 두 사람 개개인의 인기와 인지도는 더욱 확장되어갔다. 2000년대 이후로는 점점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전용 소속사를 차린 이후에는 수익의 100%를 자기들이 먹기 때문에 활동을 적게해도 버는 돈이 꽤 많고[* 실제로 톤네루즈는 거물급 게닌들 중에서도 개런티가 탑 5안에 드는 게닌이라고 한다. 반면, [[요시모토 흥업]]은 회사가 정한 급수에 따른 월급제인데다가 금전에 관련해서는 무척 짠돌이인 기획사로 유명해서 인지도가 높아도 받는 월급이 상당히 적다고. 게다가 근로계약서도 없이 모든 계약을 구두계약으로 처리하며 행사 등을 해도 게닌 대 기획사의 수익분배 비율이 1:9라고 소속 게닌들이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회사의 이익분배율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그래서 요시모토 흥업 소속 게닌들은 활동에 비해 소득이 너무 적다고 한탄하는 내용을 네타로 써먹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두 사람은 이미 전성기 시절 쌓아둔 재산이 거물급 개그맨들 사이에서도 워낙 많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2000년대 연예계 재산 조사를 했을 때, [[아카시야 산마]], [[다운타운]], [[타모리]], [[비트 타케시]]를 비롯한 수많은 거물급 개그맨들이 순위에 올라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톤네루즈 멤버들의 수익과 재산이 가장 높았다. 두 사람의 재산을 합친게 최전성기 시절 일본 연예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재산을 가졌던 [[코무로 테츠야]]와 맞먹거나 능가했을 정도.] 방송 노출이 적어서 인기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실제로 톤네루즈 두 사람은 "놀기 심심헤서 일하고 있다."라고 공언하고 있으며 덕분에 자유분방한 태도로 방송에 출연한다. '짜여진 개그'를 추종해서 많이 보다 보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게닌들과는 차별화된 이들만의 장점이다. 톤네루즈는 전성기 시절, 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오와라이 2세대와 묘한 라이벌 구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톤네루즈가 [[1984년]] [[12월 5일]], 싱글 <一気!>를 내어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톤네루즈 두 사람이 오와라이 2세대의 대표 방송 [[우리들은 익살족]]의 코너 중 하나인 <웃긴 베스트 탠>에 게스트로 출연했었는데 처음부터 사회를 보던 [[시마다 신스케]]가 '타 방송에 출연하는 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톤네루즈를 차별했고 두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익살족' 출연자들이 맥주병으로 두 사람을 가격하는가 하면, 두 사람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지고, 좁은 투명의 벽에 밀어 넣어 온갖 쓰레기를 뒤집어씌우는 등 이시바시와 키나시 양쪽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연출을 하면서 두 사람이 평소처럼 날뛰는 퍼포먼스를 할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톤네루즈 두 사람이 "이제 [[닛폰 테레비]]에 나오지 않을 테니까 용서해줘 !" "[[후지 테레비]]는 생명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녹화가 마무리되었다. [[https://www.nicovideo.jp/watch/sm13993536|당시 영상.]] 녹화를 진행할 때 톤네루즈는 프로듀서 요코자와 다케시에게 편향적인 녹화 내용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고 이 일을 계기로 요코자와 다케시가 톤네루즈를 "건방지다."며 싫어하게 되면서 이후 톤네루즈와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톤네루즈와 오와라이 2세대가 서로 반목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톤네루즈는 대표적인 칸토(관동) 출신 게닌이고 오와라이 2세대의 대다수는 칸사이(관서)의 [[요시모토 흥업]] 소속이라는 점에서 일본 특유의 [[지역감정#s-3.1.3|동서 지역간 대립구도]]를 시사하기도 한다.[[https://ja.wikipedia.org/wiki/%E3%81%A8%E3%82%93%E3%81%AD%E3%82%8B%E3%81%9A|#]] 실제로 톤네루즈 데뷔 후 막 브레이크 했을 때, 당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요시모토 출신들이 톤네루즈를 의식하는 통에 서로 방송국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긴장감이 감돌았고 톤네루즈는 방송에서 "칸사이 지방의 게닌들은 촌스럽다." 라면서 이들을 놀리는 것을 네타로 써먹기도 했다. 게다가 오와라이 2세대의 전성기를 연 방송 [[우리들은 익살족]]의 메인 프로듀서인 요코자와 다케시가 톤네루즈와 같이 방송하는 것을 거부하여서[* 각주에서 상술한 일화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톤네루즈의 많은 방송을 프로듀스한 후지 TV의 프로듀서 이시다 히로시가 요코자와 다케시와 서로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톤네루즈는 요코자와 다케시가 프로듀스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톤네루즈는 종영 직전에야 그토록 염원하던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에 레귤러로서 출연하게 된다.(<[[타모리|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역시 [[우리들은 익살족]]과 마찬가지로 요코자와 다케시가 치프 프로듀스로 있던 예능 프로그램이었고 요코자와 다케시가 물러난 이후에는 톤네루즈도 자신들의 칸무리 방송에 집중하게 되었기에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레귤러로 출연이 불가능했다.) 비록, 레귤러는 되지 못했지만 톤네루즈는 <[[타모리|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인기 코너 텔레폰 쇼킹의 최다 출연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타모리가 톤네루즈와 매우 친밀한 것을 넘어서 톤네루즈가 거의 스승 내지는 은인처럼 모시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데뷔부터 톤네루즈를 알아봐주고 브레이크하도록 힘을 써준 선배가 바로 타모리였다.][* 참고로 요코자와 다케시는 1987년 승진해서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후 후지TV의 임원 자리에 올랐으며 1995년 후지TV에서 퇴사하고 [[요시모토 흥업]]의 도쿄 지사장과 전무 이사를 역임했다. 이시다 히로시도 후에 후지TV 임원으로 승진했고 2005년 임원 정년 만료 후에도 미야케 케이스케와 함께 촉탁으로 후지 TV에 재적하고 있으며, '[[뮤직 페어]]'등을 담당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톤네루즈와 오와라이 2세대는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정설로 통했을 정도였다고. 이런 대립관계는 90년대 초, [[비트 다케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슈퍼 자키>에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게닌들이 게스트로 출연한 회차에서 톤네루즈가 깜짝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옅어지다가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를 리뉴얼해서 [[1997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부터는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게닌들이 레귤러로 빈번하게 출연하면서 더 이상 두 세력간의 대립은 없다는 걸 시사했다. [[2014년]] [[3월 31일]]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마지막 회에서 톤네루즈의 최대 라이벌이라고 꼽히던 [[다운타운]]과 톤네루즈가 같이 나오면서 확인 사살. ~~그리고 깨알같은 마츠모토의 "이런 구도면 인터넷 폭발하는거 아님?!" 보케와 하마다의 츳코미는 덤.~~[* 사실 톤네루즈가 나오기 전에도 이 말을 했고, 이 보케를 듣고 톤네루즈가 "그래? 그럼 진짜로 한바탕 저질러 보자"라며 [[폭소문제]]까지 불러서 뛰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폭소문제가 뒤늦게 나왔을 때(원래 차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옷 챙겨입고 오느라 늦었다고...) "니들은 왜 나왔냐?"는 눈치를 주는 다운타운에게 "우린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하기도(...). 결국 타모리와 산마에 더해 다운타운, 웃쨩난쨩, 톤네루즈, 폭소문제가 한 자리에 선 걸 보고 "다시한번 말하는데 SNS 폭발한다구!"라고 외친 것이고, 진짜로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그런데 이후, 당시 참여했던 수많은 게닌들의 라디오 등에서의 증언을 들어보면, 사실 톤네루즈와 [[다운타운]]은 전혀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고, (사적으로는 친하진 않아도 공연 NG를 외칠정도로 소원한 관계도 아니었다고 한다.) 단지 분위기상 업계에서 이들의 합동 공연을 막았을 뿐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후지TV 측에서 나가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톤네루즈가 "타모리씨 방송의 마지막횐데, 축제답게 끝내야지"라며 강행한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톤네루즈가 나오자 다운타운이 바로 받아치는 등 사이 나쁜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문제는 뒤에 나온 [[폭소문제]]인데, 다운타운의 마츠모토와 폭소문제의 오오타는 '''그냥 그럴것 같다라는 이미지의 톤네루즈와는 달리 진짜로 사이가 나빠서 함께 공연하지 않는 사이'''였다. 이들이 늦게 나온 것도 톤네루즈가 함께 나가자고 권해서 할 수 없이 옷 주섬주섬 챙겨입고 분위기 보다가 나오느라 그랬던 것. 그래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나인티나인이나 바깥에서 보고있던 다른 후배 게닌들이 "진짜로 나왔어!"라며 전부 놀랐다고. 그래도 이때의 난입으로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십수년만에 화해를 했다고 한다.] 사실 톤네루즈는 오와라이 2세대 전체와 대립했다기 보다는 칸사이 지방의 [[요시모토 흥업]] 소속 게닌들과 대립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로 위에도 적혀있듯이 톤네루즈가 첫 데뷔한 시절부터 이들을 눈여겨 보고 적극적으로 푸쉬해준 선배인 [[타모리]]도 오와라이 2세대에 속하긴 하지만 1980~90년대의 오와라이 2세대 선배-톤네루즈 사이의 냉전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톤네루즈 본인들이 타모리를 일본 연예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은인으로 밝힐 정도로 사이가 좋다. 또한, 톤네루즈의 저서에서 자신들은 [[비트 다케시]]를 고향 선배이자 원조 멀티 엔터테이너 선배로서 존경한다고 기재되어있다. 비트 다케시도 <오와라이 스타 탄생!!>에 출연한 톤네루즈를 일찍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고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톤네루즈에게 "도쿄 연예인, 힘내라!"고 격려한 바 있다.[* 도쿄 출신이지만 관서 출신의 요시모토 소속 게닌들과 함께 일하며 스타덤에 이른 비트 다케시가 보낸 이러한 응원 매세지는 당시 오와라이 업계를 장악한 관서 출신의 게닌들에게 톤네루즈같은 도쿄 연예인의 불을 끄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된다.] 훗날 비트 다케시와 톤네루즈는 같은 연예인 야구팀에 소속되어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톤네루즈와 요시모토 소속의 게닌들도 90년대 초반까지 서로 대립했다지만 상술되어있듯이 90년대 중반에 이미 화해했고 톤네루즈의 저서에서도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이미 예전부터 요시모토 게닌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쓰여있다. 그 이후에 [[오기야하기]]의 야하기 켄이 술자리에서 톤네루즈에게 정말로 요시모토 계열이나 칸사이계 게닌들과 안 친하냐는 질문에 여론이 그렇게 몰아간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8년 3월 22일, 장장 3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8년 12월 31일 톤네루즈의 공식 팬클럽이 폐회되었다. 2022년 현재 톤네루즈로서의 레귤러 방송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2020년부터 시작한 [[유튜버]] 활동에 집중하는 중이고 키나시 노리타케는 2018년부터 시작한 라디오 방송 <토요일 아침 6시 키나시의 모임>의 DJ와 가수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