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스카나 (문단 편집) === [[토스카나 대공국]] === 피렌체 [[공작(작위)|공작]] 알레산드로의 친척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1569년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받았다. 그 후 1737년까지 [[토스카나 대공국]]은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다. 메디치 가문은 시에나를 종속시키는 등 16세기 동안 성공적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했다. 메디치 가문은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꽃피운 과학과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피렌체 공국은 피렌체라는 도시의 군림이라기보다는 점차 한 나라로서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 토스카나는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토스카나의 산업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모직 생산이 쇠퇴하였고, 비단 생산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또한 중세부터 토스카나 지역을 지탱해온 산업들이 17세기 들어 전반적으로 퇴조를 보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산업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자 귀족들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재봉건화적인 체제 형성이 이루어졌다.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잔 가스토네]]가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지배는 끝이 나고 대공 작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로 넘어갔다. 고향인 [[로렌 공국]]을 포기하고 보상으로 받았던 [[프란츠 1세]]는 토스카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이곳을 물려받은 프란츠 1세의 3남인 개혁군주 [[레오폴트 2세|레오폴도 1세]]는 토스카나에서 농노제도의 마지막 흔적을 완전히 폐지하고 교역과 산업을 지원하며 관료제도를 개혁했다. 레오폴도 1세의 통치기간 동안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되었다. 레오폴도 1세는 1786년 형벌개혁을 단행해 토스카나를 [[사형]]제도를 폐지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로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 토스카나는 상공업의 발달로 [[길드]]가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1801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패배하자 토스카나는 영지를 잃은 [[파르마 공국]]의 [[부르봉 왕조#s-2.4.1]] 출신 [[루도비코 1세|루도비코]]에게 넘어갔다. 이 시기에 토스카나 대공국은 "에트루리아 왕국"으로 알려졌다.[* 토스카나 대공국의 원 주인 [[페르디난도 3세]]는 [[잘츠부르크]]를 보상으로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스카나는 1807년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 제1제국]]에 병합되었고 토스카나 대공 작위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Elisa Bonaparte)가 차지했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다시 [[토스카나 대공국]]을 차지해 [[페르디난도 3세]]가 복위했다. 그러나 [[파르마 공국]]의 [[카를로 2세(파르마)|카를로 2세]]에게 영지를 주기 위해 루카 공작 작위를 토스카나 대공으로부터 분리하여 수여했다. 루카는 1847년에야 다시 토스카나의 일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