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빗기 (문단 편집) == 주제와 의도 == >1) 토빗기는, 정통 [[신학]]이 기분을 전환시키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고, 믿는다는 것이 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음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토빗기는 순진한 이야기가 아니며, 저자도 그의 독자도 연대착오를 의식하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그 줄거리는 극적 색체가 풍부한 반어법으로 줄곧 점철되어 있다. > >2) 토빗기는 신심이 빈정거림과 비웃음으로 [[운율]]을 맞출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흥미로운 소책자에서 토빗과 그의 집안은 정통 [[유다교]]를 위한 [[풍자]]와 동시에 [[홍보]] 역할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고대부터 이어온 유다 전승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말해서, 가장 신성한 정승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자기 [[정체성]]의 바탕으로 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 전승들을 웃음거리로 돌리는 능력을 다시 만난다. > >3) [[신명기]]계 저자들이 그렇게 진지하게 제시했던 역사는 여기서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 대중에게 열려 있는 조합 가능한 인물과 연대와 장면의 진열대가 된다. 성경 역사와, 좀 더 넓게는 히브리어 성경 전체가 기꺼이 활용된다. 성조들, 욥, [[예언자]]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 등을 말한다{{{-2 크투빔은 토라와 예언서의 주해를 형성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여기서 '서술 주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토빗기는 독자들을 시험하기를 멈추지 않는 성경 마당의 놀이이다{{{-2 ('내가 암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맞춰봐라!')}}}. 이것이 하느님은 {{{-2 ('큰 역사'가 아니라)}}} '작은 역사들'을 통해서만 당신의 행위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하나 같이 강조하는 토빗기와 유딧기, 아마도 에스테르기와 요나서가 기본적으로 기여하는 바다. 언제나 흥겹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잘 서술된 선하신 하느님에 관한 역사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우울하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역사들이 필요하다. >---- >- 독일 신학자 에른스트 악셀 크나우프{{{-2 Ernst Alex Knauf, 1953 ~ }}}, "토빗기", Th. 뢰머{{{-2 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2 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2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299-300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