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리노 (문단 편집) === 근현대 === 고대 로마 제국 시기나 [[중세]]에 번영을 맞은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 대도시와 달리 17세기부터 발전이 가속화된데다가 이웃 프랑스의 영향으로 이탈리아하면 연상되는 로마, [[르네상스]] 양식보다는 [[바로크]]나 [[신고전주의]] 양식의 유적이 많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보이아 가문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귀족의 도시, 왕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20세기 초반부터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특히 [[피아트]])의 중심지가 되면서 노동자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등 양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반에는 줄리오 에이나우디, [[안토니오 그람시]], 카를로 레비, 레오네 긴츠부르그[*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아버지.] 등 이탈리아 근현대사에 기록된 저명한 반 파시스트 운동가들이 토리노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토리노 공업 지대는 [[연합국]]의 주요 폭격 목표였고 이후 [[독일 국방군]]의 침공으로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레시스텐자|반 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이 펼쳐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시행된 왕정 존속 투표에서는 공화정 득표율이 더 높았다.[* 통일 이후에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움베르토 2세]]가 왕태자 시절 토리노에서 머무르는 등 이탈리아 왕실은 토리노를 아꼈으나 피렌체 천도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야반도주를 하려다 적발당하자 시민들을 학살하며 반대 움직임을 묵사발내고 도망치듯 떠난 이력에다가 독일 국방군의 침공을 받자 비토레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책임하게 남부로 도주하고 남겨진 시민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치면서 왕실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해졌다. 오늘날 토리노의 주요 관광 수입이 [[알리안츠 스타디움]]과 더불어 사보이아 가문이 남긴 문화유산임을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 이탈리아 경제 고도 성장기인 50년대 후반부터 낙후된 이탈리아 남부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왔으며 이들은 토리노 선주민들과 구별되는 외모와 이탈리아어 억양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3~4세대까지 내려온 현재는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60년대 말에는 [[68운동]]의 영향을 받아 피아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가을' 운동이 있었고 70년대 [[납의 시대]]에는 [[테러]]로 수난을 겪기도 했다. 70년대에 약 120만에 달했던 인구는 현재 약 80만 정도로 줄었는데 인근 [[몬칼리에리]], [[리볼리]] 등 [[위성도시]]들이 개발됨에 따라 분산되었다. 2010년대부터는 시 자치단체에서 [[스마트 도시]]로 발전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