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구시갈파 (문단 편집) == 역사 == 이 곳이 도시로 처음 성장하기 시작한 때는 [[콩키스타도르]]의 통치 시기로, 은광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은]]의 주요한 생산지로써 발전하기 시작했다.[* 다만 20세기 초반에도 인구가 그리 많은 도시는 아니었다.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한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그래서 도시 이름의 유래도 "은의 산"이란 뜻의 원주민 언어라고 한다. 테구시갈파는 1821년 법적으로 도시가 되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온두라스는 [[니카라과|옆 나라]]처럼 자유주의 성향의 테구시갈파와 보수주의 성향의 코마야과[* 테구시갈파에서 북서쪽으로 56km 떨어진 도시. 인구는 2020년 추계 17만 2,069명으로, 현재까지 스페인 식민지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다.]로 나뉘어 갈등했다. 온두라스는 두 도시 사이에서 여러번 천도했고 1880년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수도를 테구시갈파로 정했다. 도시의 인구는 1905년 3만 5천명에서 1961년 16만명으로, 다시 2001년 85만명으로 폭증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대대적인 이농현상이 발생했으나 부적절한 도시정책으로 도시는 무질서하게 팽창했다. 1998년 말 불어닥친 [[허리케인]] 미치(Mitch)는 테구시갈파를 비롯해 온두라스 전역에 끔찍한 피해를 안겼다. 폭우로 테구시갈파를 지나는 촐루테카 강이 범람했고[* 이때 촐루테카 강의 수위는 제방보다 '''10m'''나 높았다.] 설상가상으로 산사태까지 덮쳤다. 당시 테구시갈파 시내 건물의 1/3이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그 중에는 350년 이상 된 건물도 있었다. 일부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허리케인으로 온두라스에서만 7천명이 죽고 150만명이 노숙자로 전락했다.[* 이때 난민 중 일부는 [[니카라과]]로 피신했다. 내전이 끝난지 8년밖에 안된 그 생지옥으로.] 그 가운데 테구시갈파가 포함된 프란시스코모라산 주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1천명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시장 세사르 카스테야노스 마드리드도 있었다. 이때 온두라스 대통령 카를로스 로베르토 플로레스는 허리케인 미치로 입은 피해를 회복하려면 50년은 지나야 한다고 한탄했다. 오늘날에도 테구시갈파의 시가지는 구 식민지 시절 도심으로부터 동쪽, 남쪽, 서쪽으로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도시 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시 행정부는 다수의 조례와 도시 프로젝트를 통과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