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2차 왕자의 난]] 진압 === 이후 적자가 없던 정종의 계승자 자리를 넷째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탐내어 [[박포]]와 손을 잡고 자신을 노리자 이방원은 이들마저 가차 없이 진압하였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인데, 앞선 1차 왕자의 난이 소수 정예병에 의한 궁궐 점거 쿠데타였음에 비해 이 쪽은 거의 시가전의 양상이었던 듯하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수도는 한양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것 때문에 잠깐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오가는 양측의 교전이 있었고 여기에 밀린 방간이 패했다. 결과는 이방원의 압승. 다만 역시 방번/방석과는 달리 동복형제를 죽이기는 싫었던지 박포만 악당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방간은 유배만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사실 동복형제라는 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적인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과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거 살해하면서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는데, 여기서 동복형제인 방간까지 죽였다간 이방원의 이미지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본인의 이미지로 끝나지 않고 건국 초기인 조선 왕실 자체의 이미지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될 수 있었다. 이방원으로선 숙청은 하더라도 형님의 목숨만은 살려야 자신과 왕실에게도 정치적, 대외적 이득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동복형제라는 덕을 봐서 방간 자신은 유배되어서도 그럭저럭 잘 살다 죽었다. 그러나, 방간의 아들 맹종은 아버지를 돕는다고 이방원과 이방원의 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혐의가 혐의였던지라 태종 사후 세종이 [[자살]]하라고 어명을 내려 [[http://db.itkc.or.kr/m/dir/view?grpId=&itemId=JT&gubun=book&depth=5&cate1=&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JT_D0_A05_07A_11A_00020|죽는다]]. 이방간의 자손들은 숙종 때에 복권되기 전까진 대대로 역적의 후손에 폐서인으로 취급돼서 평민과 똑같이 군역과 노역이 부과되었다. 한편 이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측에서 눈엣가시였던 방간이 '반란을 일으켜 자멸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당시 방간이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다시피 했다. 개국에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력이 뛰어나거나 곁에 유능한 무리들이 많다거나 혹은 군사적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넷째라 다섯째인 방원보다 서열에서 앞서는 게 좀 유리한 편이었지만, 이미 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이 점 역시 방원이 방간보다 못 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형을 죽이겠다고 난을 유도할 이유도 없고 이미 동생들을 죽인 이상 굳이 형을 건드려봤자 본인만 손해다. 오히려 방간이 방원이 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유일한 잇점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열받아서, 혹은 몸이 달아서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