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국조의 눈 밖에 난 왕자 === 아버지 이성계가 왕이 되자 이방원도 왕자로서 군작호를 받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지지만, 정작 실권에서는 점점 배제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정몽주 척살로 인해 이성계에게 미움을 산 것이 크게 작용했다. 정몽주 척살 모의에는 둘째 형 방과와 매제 이제, 숙부 이화도 참가했으나 아무도 실행에 옮기려하지 않았고 결국 척살을 실제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이방원이었다.[* 앞서도 나왔지만 이방과, 이지란, 이제, 이화 등은 정몽주를 척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했지만 태조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 함부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건으로 이방원에게 대노했을 때 사죄나 변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당시는 경처 강씨)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전의 용사이자 [[용장]]이며 유사 이래 최고의 신궁인 [[태조(조선)|아버지]]가 그토록 정몽주를 아꼈다는 것과, 그 앞에서 그렇게 대들다가는 그 날로 아버지 손에 끝장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방원이 몰랐을 리 없다. 단지 아들이기 때문에 살려두기에는 이방원이 죽인 인물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는 이방원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를 죽이고 감정적 동요도 없는 사이코패스였거나, 자신이 아버지의 분노를 감당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실 진짜로 억울하고 열받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뻔히 고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인 정몽주에 대해서는 물러터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원래 정몽주를 죽이든가 설득하든 이방원이 아니라 이성계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세자 자리를 주지 않아서 열받은 것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형 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순서대로였으니까 열받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삼는다는 말은 한씨 소생들은 아들로 보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열이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돼서 [[고려]]가 끝내 멸망하고 결국 조선이 세워지자 [[진안대군|첫째 형]]도 [[정종(조선)|둘째 형]]도 자신도 아닌, 문중의 적장손인 이복근보다도 새파랗게 [[의안대군(이방석)|어린 막내 이복 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적장자 대신 후처에서 얻은 막내를 편애해 나라를 흔드는 전형적인 창업 군주의 실책이었다는 주장과 이성계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방석이었다는 주장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 문서 참조.[* 문제는 방석은 막내고 그 사실만으로도 절대 적절한 조건을 가졌다고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방석이 즉위하는 순간 그 위의 형들은 전부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반면 방석은 형들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왕위에 오른 형이 어지간한 폭군이거나 혹은 방석 본인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목숨을 위협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특히 원래라면 왕좌와 가장 가까웠던 방과나 방원은 신덕왕후 강씨와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으므로 더더욱 그렇고 또, 개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므로 왕위다툼이 아닌 이상 그리 쉽게 왕족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태조와 신덕왕후의 입장에서'''만''' 합리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방원 등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토사구팽]]이었다. 아들들과 고려의 기득권층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 조선 개국 후 인척 관계를 들어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몬 것이다.[* 세자위의 안정을 위해 여타 왕자가 세자가 되었더라도 나머지 왕자들의 권력에서의 배제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차기 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세자가 아닌 왕자이기 때문이다. 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보면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 또한, 장자세습 왕조 국가에서 막내가 왕위에 오른 경우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이 있기에[*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종법제를 따르므로 적장자가 가장 우선권이 있고 이후 차남, 삼남... 순으로 계승권을 가지게 되며 적자가 없으면 서장자가 우선권을 갖고 다시 차남, 삼남... 순이 된다.], 장성한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곧잘 숙청이 벌어지곤 한다.'''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 어찌보면 이방원에게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만일 장자 계승의 원칙 따라 방우나 방과가 세자가 되었다면 이방원은 왕좌에서 완전히 멀어졌을 것이다. 정변을 일으킬 명분도 사라지며 방우나 방과에게 적자가 없어도 서열상 손윗형님인 방의와 방간이 있으니 그 다음 대에도 세자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을 떠난 순서는 태종이 가장 나중이나, 바로 이전에 죽은 [[회안대군]]은 [[1421년]] 타계하였다. 이는 태종이 승하하기 1년 전이다.] 다만 당시 방우는 정계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방과와 방의와 방간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사실 방과는 무장으로서는 뛰어났지만 정치 능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반면 방원은 과거를 급제한 문관 출신인 만큼 유학자들 중에서는 방원과 관련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당장 장인인 민제가 유학자로 이름높은 사람이라 그 제자들도 많았는데 그들 전부가 사실상 이방원의 당여라고 할 정도였고 정도전과 사이가 안 좋은 조준도 세자 자리에 방원을 거론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방과와 방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방간은 힘만 좀 셌을 뿐 능력은 없는데다가 방원의 도발에 정치적으로 자멸당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결국 방간은 승산이 전혀 없음에도 박포의 꼬임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정치적으로 자멸당하고 만다.] 동생들 중 다음 왕을 고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능력도 뛰어나고 추종자도 많은 방원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니면 1, 2차 왕자의 난 못잖은 내란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원만 나서지 않고 다른 왕자들까지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