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정몽주|고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Goryeo-Portrait_of_Jeong_Mongju-02.jpg|width=100%]]}}} || || {{{#000000 '''정적 포은 [[정몽주]]''' }}} || 비록 이성계의 개경 귀환으로 이성계 일파 숙청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여전히 정몽주 일파는 성현의 관리들을 시켜서 정도전, 조준의 사형을 주청했고, 공양왕도 이성계가 두려워 대놓고 승인을 못할 뿐 사실상 정몽주에게 동조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직접 제거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돌아가서 어머니 3년상이나 마치라고 강하게 핀잔을 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형 [[정종(조선)|이방과]], 숙부 [[의안대군(이화)|이화]], 매제 [[이제(조선)|이제]], 의숙부 [[이지란]] 등을 모아서 정몽주 제거를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성계의 반대 때문에 이지란처럼 정몽주 제거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도 나왔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정몽주 살해 계획을 단독으로 강행하였고, 직후 [[조영규]], 고여, 이부, [[조영무]]에게 지시를 내리고 도평의사사를 살해 장소로 계획하는 등 살해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간다. 한편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서 자신의 살해 계획을 듣게 되는데 이에 정몽주는 [[1392년]] [[태음력|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집에 문병을 오게되고 이성계에게 환대를 받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화가 이성계의 환대에 정몽주 살해를 주저하자 이방원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살해를 강행했고, 처음에는 정몽주가 사는 동리 입구에서 살해할 계획을 잡고 근처의 이방과의 집에서 무기를 준비한다. 정몽주가 유원(柳源)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늦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죽교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런 냉혹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을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겨우 만 24세였다. 다음은 실록에 기록된 당시 내용이다. >'''[[정몽주]]가 성헌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정종(조선)|이방과]]와 아우 [[의안대군(이화)|화]], 사위인 이제와 휘하의 황희석, 조규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은 조준이 전하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시켰다고 논핵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태종(조선)|우리 전하]]께서 몽주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태종(조선)|전하]]가 나가서 [[정종(조선)|상왕]]과 이화, 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서 [[삼년상|너의 대사]](大事)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 정탁이었다. 정탁이 극언하기를, >"백성의 이해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장상 영유종호|왕후와 장상이 어찌 혈통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태종(조선)|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로 돌아와서 [[정종(조선)|상왕]]과 이화, 이제와 의논하여''' [[이지란|이두란]]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은 말하기를, >'''"[[태조(조선)|우리 공]]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중략) 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의 저택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 유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 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전주 이씨|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정몽주|대신]]을 죽였으니, [[고려|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태조(조선)|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전주 이씨|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신덕왕후|강비]]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즉, 이 상황은 방원이 강씨더러 내 편을 들어달라고 징징대자 강씨가 정말로 태조를 타박하고 방원을 편들어준 것이다.]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131#footnote_3|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 일설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면서 둘이 만나 술자리를 가졌고, 이 자리에서 이방원이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대에 기록된 [[태조실록]]이나 [[고려사]]에는 둘이 따로 만났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애초에 정몽주는 살해당하던 날 이방원이 아닌 이성계를 만나러 온 것이었으며, 살해 당일이 아니라 해도 당시 이방원은 고작 26세로 정계 거물인 정몽주와는 정치 연배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즉, 새파랗게 젊은 이방원과 정몽주가 독대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일설[* 강전섭 저, 단심가와 하여가의 소원적 연구, 동방학지, 1983년 & 박규형 저, 단가 정형의 발생기 재고, 한민족어문학, 1988년]에는 이 시조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는데, 하여가의 만수산이라는 산은 그 시절에는 없었던 산이라는 것. 따라서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후대 창작이라는 가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이 내용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작품들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 정몽주 암살을 정말 이방원이 주도했는지, 이방원만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설도 있다. 태조실록의 정몽주 암살을 다룬 부분을 보면 공양왕 즉위 후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자 한 정몽주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방과, 이화, 이제와 휘하 부하들을 보내 공양왕에게 계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후 암살 모의가 벌어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한 이방원, 이지란, 이방과, 이화, 이제, 조영무 중에서 가장 실권에서 멀었고 발언권이 약했던 사람이 방원이다. 특히 정몽주 암살 이후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 측 인사들을 쳐낸 사람이 방과인데 그런 그들을 가장 입지가 약한 이방원이 전부 끌고 갔다는 공식이 도출된다. 지위와 연배를 고려하면 방원은 실행조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애초에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 척살을 건의했다거나 척살 모의를 주도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방원이 책임을 스스로 안고가기 위한 윤색일 가능성이 있다. * 그리고 이방원이 실권과 발언권이 적었을 거라고 하는데 애시당초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고 인맥도 많았다.[* 애시당초 조선의 명군 중 한 명이니 능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방원이 몇 번이나 해결사로 나선 적이 있던 점만 봐도 단순히 막내라고 해서 실권이 적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애시당초 모임에 나간 인물들 면면만 봐도 당시 이성계 가문에서도 최중요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방원은 가장 적극적으로 정몽주의 주살을 주장했으니 발언권이 낮다고 보기도 어렵다.[* 물론 이 자리에서는 이성계를 두려워해서 결국 아무 것도 못 하지만...] * 즉, 이는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 왕자의 난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방원은 충분히 정몽주를 암살할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 애시당초 이성계가 부상으로 잠시 리타이어한 상태에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당여들을 숙청하려 했을 때 당장 아버지한테 달려가서 억지로 모셔온 사람이 방원이었다. 이후 태종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방원의 정치력과 판단력은 아버지 태조나 정도전보다도 위였다. 괜히 건국 직후 막강한 공신들 권력을 죄다 견제하고 세종이 마음껏 치세를 펼치도록 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이방원이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 중 가장 실권 및 발언권과 멀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몽주 한사람을 살해하는데 고작 장사 몇 명만으로도 충분했고,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군권을 꽉 쥐고 있어서 정몽주 및 공양왕와는 세력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껏 정몽주를 암살하지 못했던 건 결국 정몽주가 아니라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였다. 그렇다보니 결국은 이방원이 나설 때가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이방원은 실행조에 불과하고 이방과나 다른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하면 아무리 그래도 이성계나 정도전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 또한 이성계가 이를 알고 나서 이방원을 질책했을 때, 이방원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님들의 말이라 따랐다고 변명하기는 커녕 같이 논의했다는 이야기조차 일절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누가 결정하고 실행했는지와 별개로 이성계의 분노를 혼자서 감당하기로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이성계의 분노는 내내 이방원에게만 집중되었다.[* 결국 범인임이 훤히 드러난 이방원도 죽이지 못했는데 범인을 몰랐다고 자기 당여들을 마구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정작 정몽주가 죽고 나자 [[공양왕]]을 협박해서 그대로 고려를 멸망시킨 것만 봐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할 수 있다.]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죽었음을 알리자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크게 대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후에 손자 손녀들끼리 혼인시킬 만큼 친분이 돈독했으며 [[공양왕]] 즉위 때까지 정치적으로도 동지 관계였다. 더구나 고려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할 수 있는 이성계가 정몽주를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대립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몽주는 단순한 이성계의 정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대의 대학자요 군자이며 백성들의 지지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고려 왕조]]를 떠받친 마지막 충신이었다. 이런 인물을 은밀한 암살도 아니고 자기 자식이 대놓고 살해했다는 것은 이성계의 위신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였다. 이성계로선 이방원은 참으로 '고얀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이후 수십 년간 두고두고 지속된 이성계와 이방원 간 갈등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정몽주]]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자 조선 건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공양왕이 이성계와의 동맹을 추진하고 이방원과 사예이자 사관이었던 조용을 불러 맹서의 초안을 짓게 했으나[[https://sillok.history.go.kr/id/kaa_000134|#]], 역성혁명파는 반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고나서 정도전, 조준 등을 복귀시킨 후, 최종적으로는 [[공양왕]]을 퇴위시키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지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불과 석달만의 일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17_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