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최후 === > 태상왕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적들이 와서 굴복하고, 예의가 바르고 음악이 고르며, 〈모든 법의〉 강령이 서고 조목이 제정되었다. 성품이 신선과 부처의 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사(寺社)를 개혁하여 노비를 거두고 전답을 감하였으며, 원경 왕태후의 초상에 유학의 예법을 준행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아니하였다. >----- >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5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세종과 매사냥을 돌아온 직후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1422년 5월 초10일, 한성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남동 주변)의 이궁에서 향년 5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원경왕후가 태종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며, 태종보다 2년 일찍 사망했다). 아직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세종에게 자신이 과거 유배를 보냈던 [[황희(조선)|황희]]를[* 양녕대군 문제로 인해 유배보냈다.] 다시 불러 중히 쓰라고 충고하였고, 태종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황희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된 후였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조선 태종)|헌릉(獻陵)]]이다. 애증의 관계였을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능역 근처에 23대 국왕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데, 이를 묶어서 흔히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두 봉분을 이어주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의 왕릉 중 헌릉만이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왕과 모후가 저세상에서라도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 세종의 뜻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효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태종도 생전에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거긴 장차 내가 들어갈 곳이고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절은 왜 짓냐?"며 반발했던 것으로 보아 본인도 죽으면 원경왕후의 곁에 묻히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종은 이후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 무덤 옆에 묻히겠다고 생각을 하고 헌릉 주변인 현재의 [[국가정보원]] 일대에 미리 무덤 자리를 보았는데, 여기와 관련해서는 [[영릉(세종)|영릉]] 문서 참조.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태종(조선), version=2407, paragraph=)] [[분류:태종(조선)]][[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