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여진 정벌 === 조선 최초의 [[여진족|여진]] 정벌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종 즉위 이후 명은 조선의 북방에 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 등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 여진족 부족의 추장들을 위소의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조선의 영향력 내에 있던 여진족들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명의 관직 수여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405년(태종 5) 유력 추장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동맹가첩목아]]는 명의 건주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파아손(把兒遜)은 모련위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되는 등 명의 관직을 받았다. 조선이 보복으로 여진족과의 무역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자, 이에 분개한 올적합(兀狄哈) 김문내(金文乃) 등이 1406년(태종 6)과 1410년(태종 10) 두 차례 경원을 침공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를 포함한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혔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02003_002|출처]].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즉각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명하였다.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등의 정벌 반대가 있었으나, 태종은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 등의 찬성론을 따라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전 동지총제(同知摠制) 김중보(金重寶) 등을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였다. 조연은 신유정·김중보· 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원정군 1,150명을 이끌고 2월 29일 길주(吉州)를 출발, 3월 9일 모련위의 두문(豆門)에 도착,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 파아손(把兒遜)과 아고거(阿古車)·착화(着和)·하을주(下乙主) 등 4명의 수장 및 여진족 160여 명을 죽였으며, 가옥을 불사르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모련위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03009_003|출처]]. 태종의 모련위 정벌은 단순히 약탈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조선을 배신하고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세력들에 대한 보복전으로 이루어졌다. 정벌의 결과 여진족들이 조선을 불신하게 되고, 조선의 정벌에 대한 복수로 수 차례 조선의 변경을 침략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련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건주위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1411년(태종 11년) 오도리를 이끌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태종이 죽을 때까지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침입은 거의 사라졌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4026_002|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