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청송 심씨]] 숙청 ==== [[세종(조선)|세종]]이 즉위한 직후엔 측근인 강상인까지 이용해 세종의 [[장인어른|장인]]이자 태종 본인의 또다른 사돈인 [[심온]]의 집안까지 숙청했다. 당시 병조 참판이었던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군권을 가지고 있던 태종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 후 관노로 강등됐는데, 이후 다시 강상인을 고문해서 태종과 세종을 이간질시키려 했으며, 여기에 심온이 동조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심온을 체포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심온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는데, 이들은 태종 사후에야 복권되었다. 이들을 복권할 당시 세종은 "사실 이들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바마마께서도 내심 원하신 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못한 것"이라고 했다. 즉, 정리하자면 딸이 조선의 정실 왕비이고, [[사위]]는 왕인데 정작 그 [[장모]]와 처남들은 변방에서 [[노비]]로 굴렀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만든 [[태종(조선)|사돈]]이 죽고도 친정을 시작한 [[세종(조선)|사위]]가 자기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선뜻 고치질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외척인 민씨 형제나 이숙번과 같은 공신들을 처리한 것은 그나마 이들은 왕권에 대해 위험분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 [[심온]] 숙청만큼은 조금 도가 지나쳤다는 평가가 있다. 심온도 양녕대군의 [[장인어른|장인]]인 김한로와 같이 집안 배경이 좀 좋은 것 외에는 그저 과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전형적인 행정 관료였지 주변 세력을 결집시켜 파벌을 이루려는 권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만 심온의 가문 자체는 상당히 빵빵한 명문가문으로, 그 아버지가 [[개국공신]]이었다.] 되려 [[소헌왕후|자신의 딸]]이 충녕대군과 맺어지자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박은은 세종이 충녕대군이던 시절에 심온에게 '사위 관리 좀 잘 하라.'고 말했지만, 심온은 그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박은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에게 자꾸 딴지를 걸었기 때문. 이 말에는 '이대로 세자가 즉위하면 당신이 왕에게 무사할 것 같냐.' 혹은 '충녕대군께서 왕이 되면 태종께서 당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냐.'는 의미다. 이를 두고 심온이 자기 사위가 왕이 되는 걸 보고 싶어했다는 해석도 있다.] 그나마 이 시기의 세종은 그냥 똑똑한 왕자였을 뿐 권좌 코스가 예정된 세자가 아니었으니 별일 있겠냐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이 온갖 비행을 저지른 끝에 세자 자리에서 폐출되면서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심온의 숙청 직후 박은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소헌왕후 또한 역적의 딸이니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적들에게 온갖 이유를 다 엮어대며 숙청하던 태종도 며느리의 폐출만큼은 대놓고 거부했다. 역적이면 삼족을 멸하는 게 원칙인데도 딸은 출가외인이라 연좌할 수 없다느니, 옛 경전에도 자식은 죄를 안 받는다고 나온다느니, 예전에 민씨 일가가 역적죄로 죽어나갈 때는 폐비 소리는 꺼내지도 않더니 왜 이제 와서 난리냐고 온갖 억지를 써가면서 말이다. 소헌왕후와 금슬이 좋던 세종 또한 결사반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때 당시 소헌왕후는 세종의 아들을 셋이나 낳으며 내명부의 수장으로 입지를 공고히 했고, 이미 심온의 숙청으로 인해 친가가 박살나면서 왕후로서 국정에 간섭할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태종 입장에서도 소헌왕후는 나름 신경써서 택한 좋은 며느리였으니[*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세종대왕이 [[조선]]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았다면 소헌왕후는 최고의 왕비로 평가받았다. 더 말이 필요한지?], 자신의 외척 숙청 때문에 소헌왕후까지 폐출시키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소헌왕후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의 친정을 박살냈다고 보는게 맞다. 자기 아들이 외척때문에 고생하지 않으라고 사돈가를 박살낸건데 소헌왕후를 폐출시키면 그 모든 살육이 무의미해진다. 게다가 어차피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세종이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새 왕비의 가문도 또 어느 정도 박살내야 하는데다가[* 간단히 말해서 폐출 후 새 왕비를 들이면 또 숙청, 그리고 다시 또 폐출하면 또 숙청, 말 그대로 폐출 - 숙청 - 폐출 - 숙청의 무한루프의 시작을 끊을 수 있었다.] 이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소헌왕후의 자식들 때문에 정통성이 문제가 된다. 당장 자신과 [[정종(조선)|자신의 동복 형]], 그리고 자신이 죽인 [[의안대군(이방석)|의안대군]]이 겪었던 복잡한 상황을 본인 손으로 자식에게 대를 이어 물려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태종으로선 소헌왕후의 폐출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다만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의 금슬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행여나 태종 사후에 세종이 소헌왕후의 한을 풀어주려고 하다 정국이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하긴 해서 가례색을 설치하고 세종에게 억지로 후궁들을 뽑아 들여보냈다. 고로 소헌왕후의 입장에서는 친정이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남편은 다른 여자들하고 밤을 보내고 있으니 오히려 차라리 자진해서 폐출당하고 싶었을 심정인데도 막혀버렸으니 시아버지 태종이 배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물론 태종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데는 왕비 자리를 지키는 게 유리하긴 하지만, 당장 아버지는 억울하게 역적 누명을 쓰고 심한 고문을 받고 [[자살]], 어머니는 노비로 떨어지고 가문이 날라갔는데 자식 입장에서 계속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유리할 때를 기다릴 생각은 못 하는 게 정상이다. 원경왕후 정도라면 민무구/민무질이 죽은 직후엔 후일을 도모한다는 생각을 해 볼 법도 했겠지만, 소헌왕후는 그만한 결기는 갖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소헌왕후가 원경왕후 같은 성품이었으면 태종이 [[며느리]]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헌왕후가 불굴의 의지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기에 망정이지, 보통 여인이라면 홧병으로 병사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소헌왕후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서 [[세종(조선)|왕위 계승과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왕자]]와 [[결혼]]했는데 갑자기 세자가 되고 그 3개월만에 왕이 되어 자신의 신분이 불과 1년도 안 되어 일개 왕자의 부인에서 왕비로 올라갔는데, 그 다음 1년 사이에 [[시아버지]]가 아버지를 사사시키고 자신의 가족들을 관노로 보냈다고 쳐 보자. 그리고 소헌왕후가 알았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안다면'''? 딱 사람 미치기 좋은 환경이다. 물론 정말로 소헌왕후가 죽게 되면 태종 입장에서는 빅엿을 먹은 기분이겠지만...조선시대의 왕에게 왕비는 단순히 왕손을 낳아주는 기계가 아니라 내명부의 수장이기도 했기에, 왕은 아무리 싫다 해도 왕비를 얻을 것이 거의 의무이다시피 했다. 훗날 [[영조]]가 [[환갑]]을 넘긴 이후에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를 맞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종(조선)|문종]]을 제외한 조선의 역대 왕들은 왕비가 일찍 죽으면 전원 예외없이 [[재혼]]하여 계비(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였다. 단, 예외적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에도 새 왕비를 맞지 않았다. 각설하고, 다시 태종 쪽으로 돌아와 보면 소헌왕후가 만약 갑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기껏 소헌왕후의 친정을 개작살냈더니만 덜컥 왕비가 죽어서 다시 왕비를 맞아야 하고 그 새 왕비의 친정도 또 개작살내야 한다는 심히 뒷골이 당기는 상황이 온다. 더욱이 이 시점에 이르면 "전 왕비 친정을 박살 내서 전 왕비가 죽게 했는데 이젠 새 왕비 친정을 박살 내서 새 왕비를 죽게 할 셈입니까?"라는 반대론이 나올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게다가 인륜상으로도 결국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네 집안을 박살 내 며느리도 죽게 만든 것이니(그것도 며느리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결코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따라서 위에 언급했듯이 태종 입장에선 소헌왕후 본인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결국 태종의 사돈들 중에서 숙청을 피한 쪽들은 불교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계승에서 배제된 [[효령대군]]과 [[어른]]도 못 되고 [[요절]]해버린 [[성녕대군]], 그리고 서자들의 처가 정도였다.[* 성녕대군의 처가의 경우에는 성녕대군이 너무 일찍 죽어서인지 좀 많이 우대 받았다. 세종 때 바뀌긴 하였지만, 태종 때만 해도 사위는 군에 책봉되는 등 나름 우대받았다.] 단 심온의 가문이 마냥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심온 문서에도 잘 나와있다. 심온 본인은 청렴한 사람이었고, 심온 개인 한정으로만 보자면 태종에게 잘못한것도 없고 정사를 처리한 면에서 잘못한 것도 없다. 단 심온의 가장 큰 죄는 집안 관리를 잘못했다는 것이었고 외척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태종의 심리를 이전에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제처럼 자신의 집안을 다그치고 태종에게 자신의 집안을 쳐내달라고 간청했으면 태종이 심온 자신만은 민제처럼 어떻게든 구명해줄 수까지야 있었을것이나 심온 자신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심온에게도 결국 화가 끼치게 된 것이다.[* 다만 민씨 사형제의 아버지였던 민제와 달리 심온은 집안에서는 심덕부의 후처의 아들이고 굉장히 늦둥이라서(심덕부가 1328년생, 심온이 1375년생으로 부자간 '''47년'''의 터울이 나는데 결혼을 빨리 했던 당시로서는 거의 부자간이 아니라 조손간 뻘이다), 터울이 많이 지는 이복형들을 원활하게 단도리하기에는 어려윘을 것이다. 심온도 태종의 외척 경계에 대해서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사위인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오른 후 은퇴의 뜻을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