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신덕왕후 강씨 격하 ==== 아무래도 외척의 발호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 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게다가 정릉이 묘로 격하되어 버린 때도 심온 숙청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실제로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아내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서울 성북)|정릉]]을 서울 도성 안에 조성했다. 왕릉은 도성 안에 조성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왕조의 법이지만 태조가 강씨를 사랑한 탓에 법률을 어긴 것이다.[* 신덕왕후가 죽고 뒷배가 사라진 세자 방석에게 권위를 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태종은 정릉 근처의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특히 최측근이었던 [[하륜]]이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륜은 자신의 사위들까지 동원하여 노른자 땅을 가장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았다.] 신덕왕후의 능 근처에 공신들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곤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나중엔 신덕왕후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를 파하지도 않다가,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내기까지 했다. 태조가 죽은 뒤에는 신덕왕후를 대하는 예우를 왕비에서 [[후궁]]의 격으로 완전히 격하했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서울)|중구]] 정동에 있었지만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한 술 더 떠서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 그리고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할 때 쓰이는 광교의 재료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그래서 광교를 잘 보면 석물에 새겨진 문양이 뭔가 화려한 걸 볼 수 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분명히 정식 부인이었고, 이 때문에 신덕왕후는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백히 태종의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태종으로서는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신덕왕후는 이방석의 위치를 다지기 위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지속적으로 경계했으며, 그중 가장 많이 견제당한 사람이 바로 태종이었다. 비록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에는 태조의 의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했던 신덕왕후를 태종으로서는 좋게 볼 수 없었다.] 신덕왕후는 [[현종(조선)|현종]]대에 가서야 [[송시열]]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무덤 또한 능으로 복구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2033368|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록에 따르면 정릉이 태종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던 날 많은 비가 쏟아져 당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이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수근거렸는데 훗날 250여년이 지나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다고 한다. 이때도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덕왕후가 대체 의붓아들들과 첫 번째 부인에게 무슨 지독한 짓을 했나 싶은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씨 부인과 의붓 아들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와 신덕왕후가 막내 아들 의안대군을 세자로 올리는 과정에서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조선)|정종 이방과]]가 아버지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를 도왔고, 태종 본인은 위화도 회군 당시 신덕왕후 강씨와 그의 소생 아들들을 대피시켰고, 정몽주를 격살하는 등[* 이 일로 인해 이성계의 진노를 샀지만 말이다. 사실 이성계가 깨어난 후로 정몽주가 이성계를 어찌할 방도는 막힌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였고, 정몽주는 역적으로서 저잣거리에 매달렸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이상 그 사정이 어찌되었냐를 떠나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방해물을 제거한 일등 공신이 되는 것이다.]의 공로를 세운 일등 공신이다. 태조가 세자로 장남 [[진안대군|이방우]]나 차남 [[정종(조선)|이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아무리 권좌에 대한 야심이 강한 태종이라 해도 자기가 왕위에 오를 명분을 찾는 데 엄청 애를 먹었거나, 아니면 끝내 권좌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장남 이방우는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장자 승계 원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적장자였다. 이방과는 이방우가 일찍 죽은 후[* 창왕 폐위와 공양왕 즉위 이후 후계구도에서 배제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방우가 창왕의 책봉을 위해 명으로 가는 사신단의 수장이었는데, 이 창왕이 폐위되면서 이방우는 버림패가 됐다는 것.] 실질적인 적장자의 위치를 가졌으며 군사적인 전공 면에선 태종을 능가했다. 하지만 그런 형들도, 자신도 아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이복 막내가 세자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에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통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세력을 빼앗게 된다. 몹시 적개심이 일었을 것이다. 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신덕왕후의 일을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릉(貞陵)은 내게 조금의 은의(恩義)도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신은 신덕왕후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태조(조선)|아버지]]를 봐서 제사만은 지내주겠다는 말이다.] 다만, 태조가 어째서 장성한 아들들을 건너 뛰고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에 대한 책임을 태조가 아니라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에게 몰기 위해 태종이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록에서도 이방석 책봉 당시의 기사에서는 일관되게 태조가 직접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관철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정도전조차도 원래는 이방석 지지자가 아니었다.] 또 원한도 원한이지만 정통성의 문제도 걸려 있는데, 신덕왕후를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면 의안대군은 적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는 태종과 그 후손들의 정통성 확립에 좋을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면 의안대군은 후궁의 자식이 되므로 정통성도 없이 세자위를 차지한 것이 된다. 이렇듯 개인적 원한으로만 보이는 일이지만 깊게 보면 정통성의 문제와도 밀접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