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생애 (문단 편집) === 사병 혁파 === 우선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모조리 없애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하여 [[삼군부]]에 주었다. 아버지와 본인이 사병을 이용해서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병을 철저히 분쇄하고 인원을 국군으로 재편했다. '''이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도전도 사병을 혁파해야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조선은 태종 ~ 문종 때 계속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정도전]] 역시 1차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 혁파를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다 역으로 살해당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다. 이거이는 [[태조(조선)|태조]]와 사돈 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 때에는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 뒤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 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죽을 때까지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 사실 정도전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이념가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수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직 고려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반대파 대신을 탄핵하려던 중 그 계획이 발각되어 자신이 역으로 곤란에 처했다. 이는 정도전이 30대 시절에 벼슬에서 밀려난 이후 40대에 되어서야 복귀한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들은 20, 30, 40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반면 이쪽은 30, 40대에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다지는 데 보냈고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었으니 정치적 수완이 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도전에 가려졌지만 같은 동료였던 조준이 정치력이나 실무능력면에서는 정도전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외골수였던 정도전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일관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