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 (문단 편집) == 개요 == >[[태조(조선)|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中''' >오늘 부터 [[세종대왕|충녕]]에게 왕의 즉위를 넘기겠노라! >----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며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芳遠),[* [[조선]]의 [[조선/왕사|역대 왕들]] 중에서 아버지 [[태조(조선)|이성계]]와 더불어서 [[묘호]]보다 [[이름|본명]]이 더 유명하다. [[태조(조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사|왕위]]에 오르기 전 행적들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군주 중에는 매우 드물게도 [[피휘]]를 안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피휘]]를 고려하여 개명을 안 하는 대신 [[피휘]] 관리(처벌)도 안 하겠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자는 유덕(遺德).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를 대낮에 살해하면서 아버지에게 큰 노여움을 샀고, 조선 건국 뒤에는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을 뿐, [[정도전]],[*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경우 이방원도 세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태조(조선)|태조]]가 [[신덕왕후]]의 입김과 상황을 고려하여 이방원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역시 신덕왕후 소생 자식들 중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 쪽을 세자로 추천했다.] [[심효생]], [[남은]]과도 갈등하며 왕세자로 책봉되지는 못 했다.[* 이방원의 성격이나 [[정몽주]] 살해 등 과격한 행태에 아버지 [[태조(조선)|이성계]]가 반감을 품었다는 추측 이외에 [[이방석]]이 형 [[무안대군|이방번]]까지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것에 대해 [[철원 최씨]], [[안동 권씨]], [[여흥 민씨|황려 민씨]] 같은 [[고려]] 구(舊) [[외척]] 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조선왕조실록]]》에는 단지 이방번의 성격 문제로 막내아들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핑계일 뿐이다. 그 외에도 왕후 역시도 조선 개국에 많은 도움을 준데다 태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점에서 그 소생인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는 것 역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었다.] 이에 [[1398년]](태조 6년) [[1차 왕자의 난|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조선/역대 왕세자|왕세자]]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과 [[이방석]]의 친형인 [[무안대군|이방번]][* [[이방번|방번]]은 원래 세자 문제와 관련 없었기에 왕자의 난에 참가했다면 살려주려 하였으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태종의 바로 윗 형인 [[회안대군]]이 "[[신덕왕후|역적]]의 [[의안대군(이방석)|씨]][[무안대군|앗]]은 하나라도 살려둘 시 화근이 된다며, 꼭 살려둬선 절대 안된다"고 하면서 성밖을 떠나는 [[이방번|방번]]을 길거리에서 그대로 죽여버렸고 그 죄를 본인이 받는다.], [[의안대군(이방석)|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어 [[태조(조선)|태조]]가 둘째 아들 [[정종(조선)|이방과]][* 태종은 형 [[정종(조선)|정종]]에게 [[묘호]] 대신 공정왕(恭定王)이라는 애매모호한 [[시호]]만 올렸으며 이로 인해 [[정종(조선)|정종]]은 오랫동안 그 지위가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무려 300년이 지난 [[숙종(조선)|숙종]]대에 다시 올린 것.]에게 [[조선/왕사|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차기 왕의 자리를 공고히 하였으며, [[1400년]](정종 2년)에 [[태조(조선)|태조]]의 4남이자 동복형인 [[회안대군|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마저 완전히 진압하고 그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같은 해 형인 [[정종(조선)|정종]]에 의해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왕세제|세제]]로 책봉된 것이 아니다.]로 책봉되었으며, 곧 [[정종(조선)|정종]]의 [[양위]]를 받아 마침내 [[조선]]의 제3대 [[조선/왕사|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조선/왕사|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 뿐 아니라, [[조선/왕사|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여흥 민씨|외척]]들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냉정하게 [[숙청]]하였으며, 이는 자신의 [[조선/왕사|후계자]]인 삼남 [[세종(조선)|세종]]의 훌륭한 치세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의 상황을 잘 수습하고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그 책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태종]]이라는 [[묘호]]에 참 잘 어울리는 업적을 쌓았다. 요약하자면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 중 하나이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과 [[외척]] 숙청[* [[여흥 민씨]] [[숙청]].] 등의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지켰지만, 권력 다툼 중에 고관의 피는 흘릴지언정 백성을 해하는 경우는 없었고, 본격적인 [[세종(조선)|조선의 태평성대]]를 여는 기반을 닦은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