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송) (문단 편집) === 내정 사업 === 송 태종 조광의가 즉위했을 때 송나라는 건국한 지 고작 17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태종은 새로운 포부를 밝히고 형 조광윤이 미처 완수하지 못한 통일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정사를 논하라고 명을 내렸으며 자신과 상주하려는 자들과는 직접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군신들의 의견을 듣고 직언하게 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로움과 병폐 및 시정의 득과 실을 들으면 상서하여 직언하되, 숨김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직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실행하게 했다. 송 태종은 과거제 정비에 힘을 쏟았는데 과거 거인들을 직접 시험했던 방법을 본받아서 시제를 내고 진사와 제과를 복사했다. 따라서 977년에는 1과에서 무려 500명이 합격해서 전에는 유례없는 인원이 선발되기도 했다. 이때 태종은 자신의 시종들에게 "짐은 박식한 인재를 시험에서 선발하되, 열에 다섯이 뽑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한둘에 그쳐도 (그들을) 정치 도구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또 981년 차견원을 설치하여 상참관[* 송나라 초 상참관 제수는 모두 상서성에서 결정했다.]으로서 외지에서 임지하다가 돌아온 신하들을 모두 차견원에서 '시험 성적 + 인품'에 따라 중서성에서 빠진 인원을 고려하여 임용케 했고, 태종은 모든 관리 시험의 임용과 제수에 관여했다. 그리고 991년에는 대리시, 형부 관리들이 마음대로 법을 운용하고 판결하는 것을 막고자 심형원을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서의 판결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하여 기록, 날인 후 이를 대리시와 형부로 넘겨 검토케하고 황제에게 보고케 했다. 그리고 이를 황제가 다시 심형원에 검토한 것을 넘겨 상세히 심의케 한 뒤, 황제의 재결을 거쳐 중서성으로 넘기게 했다. 아울러 판결이 부당할 경우에는 재상이 이를 상주하게 하고, 따로 논의 후 결정케 했는데 이 조치들은 황제권을 강화하고 재상의 권한들을 황제가 가져오게 했다. 또한 형옥의 남발을 방지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이를 백성이 두드리면 태종이 직접 이를 듣고 판단했다. 아울러 수도로 압송된 죄인들은 황제가 직접 심문했다. 실제로 993년 경기 지역의 농민 모휘라는 사람이 [[돼지]]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서 신문고를 두드리자 태종이 이를 듣고 직접 돼지 값을 물어주기도 했는데 태종은 이때 재상과 신하들에게 '짐이 이런 사소한 일도 직접했는데 웃을 일이지만 이 마음으로 천하에 임하면 백성들이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태종은 재위 22년간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 업무들을 도맡아 처리했고 종종 아침부터 일을 하느라 점심까지 거르기도 했다. 아울러 정사에 매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냥과 주색을 삼갔는데, 매를 잡는 개들을 풀어주고 사냥을 하지 않았다. 반면 태종은 저녁에도 늘 책을 읽었고 가족들이 거주하는 동서 6궁에서의 유혹들을 피했다고 한다. 또 바둑을 자주 뒀고 전국 각지에서 고수들을 직접 초빙하는 등 바둑을 좋아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