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대왕 (문단 편집)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태조대왕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 ==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만 보자면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에 만 6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46년에 왕위를 [[고수성]]에게 물려줄 때까지 무려 93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만약에 실제라면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태조대왕, [[장수왕]]과 달리 반대로 한국사의 군주들 중 가장 단명한 군주는 [[고려]]의 [[창왕]]으로 [[한국]] 나이로 겨우 10살의 나이에 주살되었다.] 사실이라면 [[페피 2세]]에 이어 [[실제로 장수한 왕들|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 재위한 인물]]이다. 《삼국사기》가 아니라 《[[후한서]]》 등 당대 [[중국]] 기록을 기준으로도 재위 기간만 68년에 74세에 죽었어도 고대 세계에서는 충분히 장수한거다. 그런데 만 118세라는 [[수명]]은 현재 기록된 [[기네스 세계기록|기네스북]] 남자 최장수 수명(116세)보다도 2년이나 길며, 기네스북에 공인된 최장수 인물인 [[잔 루이즈 칼망]]의 122년과 불과 4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현대 [[의학]]과 [[위생]] 관념이 부재하던 2,000년 전 인물이 이 정도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물론 장수인들의 가족을 보면 직계가족 역시 장수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를 초장수인의 실제 장수 여부를 판별할 때 뒷받침하는 용도로 쓸 정도긴 하고, 태조왕의 형제들도 상당히 오래 산 편이기는 하나 태조왕의 118년 수명은 그런 것을 감안해도 여전히 비현실적인 수준. 고구려 왕의 나이 문제는 태조대왕만 있는 게 아니다.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의 동생인) [[차대왕]]은 71년에 태어나서 7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에 태어나서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70대인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형제간에 나이 차이가 43년까지 벌어진다는 것도 이상하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은 서로 형제로 언급되는데 각각의 나이차는 24년, 18년. 그러니까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이는 40년으로 통상적인 [[생물학]]적 형제가 되기에는 불가능한 나이가 되는 것인데 노산도 정도가 있는 거다. 그래서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이들이 각자 아들, 손자 관계라는 설이 있다.] 이복형제라고 둘러댈 경우 말이 되기는 하지만 삼형제의 아버지 [[고재사]]의 기록도 이상하다. [[모본왕]]이 시해당한 후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재사가 자신이 연로하다며 사양해서 아들인 태조대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부터 의문인데 당시 고구려는 부자 상속이 아닌 형제 상속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고재사가 즉위할 명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수렴청정]]을 했다는 [[부여태후]]는 기록을 보면 고재사의 아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남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여자가 [[섭정]]을 한 게 특이하다.] 고재사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재사보다 형일 [[대무신왕]] 무휼이 서기 4년에 태어났으므로 서기 53년에 고재사는 50세가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재사의 아들로 나오는 차대왕, 신대왕은 각각 서기 71년, 89년에 태어났다고 하기 때문에 연로하다며 왕위를 태조대왕에게 양보한 재사가 그로부터 20년~40년 후까지 더 살아서 아들을 낳은 셈이다. 유리명왕이 서기 18년에 승하했으므로 신대왕이 태어났을 때 고재사가 살아있었다면 최소 71살이고, 모본왕이 죽었을 때 35세인 젊은 사람이 스스로 연로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현실적인 나이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원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초기 군주들의 수명이 비상식적으로 길게 기록돼 있다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나타남을 감안해도 군주들의 수명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에 비해 비교적 신뢰를 얻고 있는 〈고구려본기〉에서[* 이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중 고구려 관련 기사가 가장 소상한 편이고 백제, 신라와 달리 중국 측 사서와 교차검증이 가장 잘 되는 편이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는 육로로 접해있고 국가꼴을 갖춘 고구려만 실어준 것이고, 본토에서도 멀고 [[삼한]]의 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백제와 신라 쪽은 적어 주지 않은 탓도 있다. 그나마 [[풍납토성]], [[나정]] 등의 발굴 성과로 인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팽배하던 예전과 달리 현재는 백제와 신라의 초기 기록이 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편이다.] 특정한 시간대에 연속해서 왕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이 시기만큼은 백제, 신라 기록보다도 불신도가 더 높은 편이다. 이 때문에 후기에 신라 중심 사관으로 [[역사]]를 쓴 [[김부식]]이 고구려의 연대를 줄이기 위해 초기 왕들을 합쳤다는 의혹이 [[조선시대]]부터 제기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고구려가 기원전 2세기, 3세기에 세워졌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쪽 구석에 있던 신라가 [[부여]]를 이은 고구려보다 먼저 세워졌으니 조선 시대부터 의혹이 생길 만하다. 다만 한국 사학계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 연대가 끌어올려졌다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지,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끌어내려졌다는 데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남당 [[박창화]]도 태조대왕의 나이를 의심하여 그의 소설 《[[남당유고]]》에서는 태조대왕의 치세 앞쪽을 고재사가 재위한 기간으로 분리해놓았다. 아마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참고한 《[[해동고기]]》의 내용에 몇 가지 오류가 있었을 듯 하며 후대에 태조대왕의 기록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후손인 [[장수왕]]도 97세까지 장수했다고 하고 동시대 인물인 [[명림답부]]도 만 112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김부식 입장에서는 "저렇게 오래 살았다는데 삼형제 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건덕지가 있기는 했다. 다만 장수왕은 여러 사료에서 일치하는 서술이 나오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해서 신빙성이 높지만 태조대왕과 차대왕, 신대왕, 명림답부는 다른 역사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